<반역자가 된 구국의 영웅>
추후에 나온 자료에 의하면 드골은 자신의 군 대선배인 페텡 원수가 재판에 회부되지 않도록 배려한 흔적이 있다. 우선 히틀러는 나치독일군대를 프랑스에서 후퇴시키면서 페텡을 독일로 납치해 시그라린겐의 성에 인질로 잡아놓고 친나치망명정부의 수립을 강요했다. 그러나 페텡은 일거지하에 히틀러의 망명정권 수립요구를 거절하고 히틀러에게 프랑스로 보내달라고 계속 요청했다.
드골은 『전쟁회고록』에서 시그라린겐 성에 접근하던 프랑스군 드 라트르 장군이 페텡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적었다.
“페텡과 비시의 장관들을 발견하면 어떻게 할까요?”
“모두 체포하시오. 그러나 나는 페텡 원수를 만나고 싶지 않소.”
학자들은 드골이 이 말을 한 진정한 목적은 페텡이 프랑스에 돌아오면 숙청재판에 회부해야하므로 페텡 원수가 프랑스로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고 풀이한다.
사실 페텡 원수는 히틀러가 동부독일로 이동하라고 요구하자 그의 말을 듣는 척하면서 독일외교관이 스위스로 도피할 것을 주선하자 순순히 스위스에 도착했다. 스위스에서는 페텡을 영접하면서 망명을 원한다면 거절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페텡은 자신이 있을 곳은 프랑스라며 망명 제의를 거절하고 프랑스에 귀국하여 결국 숙청재판에 회부된 것이다.
드골이 군의 대선배인 페텡원수에 대해 여러 가지 배려를 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89세의 페텡 원수가 심판을 받아 선고될 것이 분명한데도 귀국을 결정했다는 것은 용감한 일이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페텡 원수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골에 의해 주도된 역사는 페텡을 민족반역자, 드골을 심판자로 만들었다.
<프랑스 총탄으로 죽고 싶지 않다>
비시정권의 국가원수인 페텡이 재판을 받자 그의 휘하에 있던 많은 관리들이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재판 중에 가장 프랑스인들을 화나게 만든 사람은 비시 정권의 파시스트 총리 라발 등 비시정권 추종자이다.
라발은 독일에서 스위스로 탈출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그 대신 스페인에 3개월간 체류할 허가를 받았다. 나치의 도움으로 연합군의 체포를 면하고 독일 비행기로 스페인으로 날아가 프랑코 총통의 환대를 기대하였으나 스페인은 1944년 7월, 그를 독일로 축출하였고 거기서 미군에게 체포되어 다시 프랑스군에게 인계되었다.
그는 예비심문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다른 사람이 용감하게 프랑스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동안 나는 4년 동안 불행했던 조국의 생존을 위해 공헌했다. 진실이 모두 공개되면 나의 애국심과 용기는 결코 의심할 바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를 기소한 검사들은 라발의 범죄는 1940년 이래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증거가 필요 없다고 까지 주장하였다. 여하튼 그는 재판정에서 계속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여 프랑스인들을 격분케 했는데 판결은 예상대로 10월 9일 사형이 선고되었다. 드골은 재심 신청을 거절하고 사형을 그대로 추인하였다.
그의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 교도소 직원이 그를 데리러 왔을 때 라발은 비밀리에 숨겨두고 있던 독약을 삼켰다. 의료진이 도착하자 그는 응급처치를 거부하며 ‘프랑스의 총탄'으로 죽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의사들이 적극적으로 그를 치료했고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것을 집행관에게 확인시키자 집행관은 곧바로 사형집행을 명령했다. 그는 사형장에서 ‘프랑스 만세'를 외쳤다고 알려진다.
한편 1944년 8월 20일 비시 정권 각료와 지지자들은 독일군의 의 경호를 받으며 독일로 들어가 망명정부를 세우고 1945년 4월까지 버텼다. 하지만 결국 비시 정권의 각료 등 대부분은 프랑스의 임시정부에 의해 재판을 받고 상당수 처형당한다.
드골이 페텡과 라발에 대한 역사상 최대의 재판을 종결함으로써 나치협력자 청산이라는 중대한 고비를 무사히 넘긴 것이 그 후에 벌어지는 많은 사건들을 무난히 마무리하게 만들었다고 학자들은 인정한다. 비시 최고지도자 두 명에 대한 재판이 말끔하게 끝나자 아무도 드골의 나치협력자 숙청에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프랑스의 독일 점령 하에서 대표적 부역자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비시정권은 나름대로 존립과 정당화의 여지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자신의 어두운 역사와 부끄러운 과거를 과감하게 도려내는 역사적 과업을 수행함으로써 민족적 정통성을 곧추세웠다. 학자들은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프랑스 사람들이 나치독일의 점령이라는 민족적 수치와 굴욕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종전 반세기를 계기로 참된 민주주의를 위한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흔히들 ‘나치협력자’로 불리는 민족반역자들을 엄정하게 처단하여 민주주의를 올바로 세웠다는 자부심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프랑스는 4년여 동안의 나치점령시기, 역사로부터 떼어내고만 싶은 암울했던 점령기를 과거에 대한 준엄한 심판과 처단을 통하여 극복했으며, 그 당연한 결과로 가장 선진적인 민주국가를 건설하는데 성공했다. 나치협력자에 대한 처단을 통해 프랑스가 보여준 과거청산의 본보기는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자유와 사회정의, 그리고 인권이 참되게 존중받는 민주국가 건설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고 평가해도 지나침이 없다.’
<민족반역자는 프랑스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외국인>
페텡의 재판과 지식인에 대한 재판을 앞에서 설명했으므로 다소 중복되거나 시간 상 엇갈리기도 하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드골 정부의 나치협력자 청산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드골은 유명 언론인과 지식인, 비시 정권의 고위 관리들을 숙청한 후 각계에 뿌리박은 나치협력자 또는 부역자들을 철저히 숙청하기 시작했다.
우선 민족을 배반한 경찰과 판검사가 나치협력자를 심판할 수 없다는 대 전제아래 경찰과 사법부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벌여 1944년 말에 이미 5,000여 명이 경찰이 체포됐다. 403명의 판사들이 나치협력 혐의를 받았는데 이것은 전체 판사의 17퍼센트에 이르는 숫자였다.
나치협력 외교관에 대한 숙청은 속전속결로 이뤄졌는데 1945년 1월에 대사급 75퍼센트, 공사급 40퍼센트, 참사관급 25퍼센트가 처벌받았다. 교육성도 무려 6,000여 건의 나치협력자 혐의사건을 심사하여 교육성의 고위공직자 357명이 직위박탈 등의 중징계를 받았다. 물론 초기 숙청이 다소 무리한 점도 있어 1953년 이후 500여 건의 재심 청구가 들어와 모두 이유 있다고 판정되어 원상회복 조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드골이 매우 고심한 것은 군부의 숙청이다.
그는 우선 나치독일에 대해 유리한 입장을 취한 군의 조직이나 단체에 가담한 장교나 하사관은 모두 파면시킨다고 규정했다. 1946년 말까지 모두 10,270명의 장교들이 조사 받아 650명이 파면 당했고 2,570명이 전역 당했다. 지방공무원도 5만여 명이 나치협력혐의로 조사 받았다. 프랑스임시정부의 공식적으로 16,113명의 고위공직자들이 응징되었다고 발표했다.
군‧관‧정계의 숙청을 단행한 드골은 나치독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거나 지원한 대기업 사주들도 예외 없이 숙청했다. 드골은 나치협력 대기업 소유주의 재산을 몰수했고 그의 기업을 국유화했다. 물론 국유화되는 기업들의 주식은 정부가 현 시가대로 보상하여 선량한 주주에게는 손해를 주지 않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드골이 기업을 국유화하는 것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았다. 그것은 프랑스가 자랑하는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드골은 이와 같은 비난에 대해 세계대전의 폐허에서 사회개혁과 경제복구 즉 프랑스국민의 공동이익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행하는 긴급조치라고 대답했다. 드골은 개인의 이익을 다소 희생하더라도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프랑스가 패전한 것 같은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국가와 국민 전체의 이익을 먼저 수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골의 기업 즉 경제부문에 대한 숙청은 정치, 행정, 언론 등 다른 부분에 비해 매우 관대했다. 프랑스에서 가장 큰 규모의 르노자동차는 국유화되었고 사주 루이 르노는 옥중에서 사망하였지만 기업의 대표가 구속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으며 대체로 재산몰수형에 처해졌다. 드골도 전후 경제회복을 위해 기업활동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부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드골의 국유화 정책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 대기업들이 나치점령시절 나치독일의 경제와 군수물자를 지원하기 위해 자의든 타의든 동원됐다는 약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당시 국유화된 대기업으로 프랑스의 유명한 항공사 ‘에어 프랑스’, 세계적인 자동차를 생산 회사인 ‘르노’, 파리지하철 등이 있다. 누구도 감히 드골의 대숙청과 국유화 조치 등 경제개혁에 비판을 하지 못한 것은 드골 개혁이 갖고 있는 고도의 공정성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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