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나치 부역자 청산

유럽의 나치 부역자 청산(4)

Que sais 2021. 7. 10. 20:46

https://youtu.be/HFCjT8OL3fc

<언론인에 대한 추상같은 재판>

일반적으로 파리숙청재판정에 처음으로 끌려나온 나치협력 지식인은 조르주 쉬아레즈로 알려진다. 그는 전쟁 전에 유명한 클레망소와 페텡의 전기를 쓴 역사가였으나 나치점령시절 친 비시정권 일간지 <오늘>의 정치부장으로 그가 쓴 103건의 기사가 프랑스 형법 제75조의 반역죄로 기소되었다.

 

조루쥬 쉬아레즈

검사는 쉬아레즈를 비롯하여 나치선전원으로 전락한 조국배반 언론인들을 준엄하게 심판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쉬아레즈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자 프랑스를 방어해 주는 나라는 독일뿐이라고 기사화했고 영국과 드골의 도발자들이 폭격을 감행하면 나치로 하여금 유태인, 공산주의자, 프랑스 거주 미국인과 영국인을 인질로 잡아 대항하자고 말했다.

그의 죄상이 워낙 명백하므로 변호인은 나치독일 점령기간의 반역행위란 시간의 선택문제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문학적인 재주와 경력을 감안하여 판결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냉철하게 사형선고와 함께 전 재산몰수, 수치국민 판정이 내려졌다. 항소는 기각되었고 곧바로 처형되었다.

근래의 연구 자료에 의하면 쉬아레즈보다 <자동차>, <작은 니스사람들>, <공화주의 리옹> 등 신문을 발행한 알베르 르전이 먼저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쉬아레즈에 이어 스테판 로잔느가 법정에 섰다. 그는 <르 마땡>지의 사설을 통하여 친독일 주장을 하였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는 나치점령시기에 프랑스 최대의 일간지가 버젓이 발행되기 위해서는 언론인의 간과 쓸개를 모두 내어놓아야만 했다고 변호했다. 또한 독일로부터 돈을 받거나 공모한 적이 없기 때문에 반역죄가 될 수 없다고 변론하였으나 20년의 독거 구금, 재산몰수, 수치국민 판정이 내려졌다.

쟌 뤼세르는 일간지 <누보 땅>의 발행인으로서 언론인 부역자의 상징이었다. 언론부역자들의 이데올로기적인 가이드 역할을 했던 신문협회의 회장을 지내면서 독일 대사 오토 아베츠의 친한 친구로서 점령하의 파리에서 가장 막강하고 유명 인사였다. 19461월에 열린 그의 재판에서 검사는 '펜에 의한 반역 범죄'를 저질렀다고 결론내렸다. 그에게 사형, 재산몰수, 치국민판정을 받았다.

 

프랑스 천재대학교 에꼴 노르말

이후 수많은 신문사 사장, 언론인들이 민족반역자로 재판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주목을 끈 사람은 천재대학교로 유명한 파리고등사범 즉 에꼴 노르말(Ecole Normal) 출신 작가이자 언론인인 브라지야크로 그가 19451월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는 36세에 불과했다. 그의 아버지는 모로코 식민지 군대 장교로서 1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했으므로 전형적인 '잃어버린 세대'의 프랑스인 중에서 발군의 프랑스인으로 인식되었다. 

그의 재판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것은 프랑스가 낳은 보기 드문 인재라는 프랑스인들의 인식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나치협력은 너무나 다양하고 방대했다. 그는 1937년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 전당대회를 보고 열렬한 파시스트로 전향하였다.

 

브라지야크(좌)

독일 여행을 통해 히틀러와 그의 군행렬을 직접 보고 온 브라지야크<르뷔 유니베르셸>이라는 잡지에 히틀러와의 100시간 - 뉘른베르크 회의기사를 쓴다그는 독일 여행을 통해 살아 숨 쉬는 젊은 독일에 매력을 느꼈으며, 괴테, 베토벤 등 조국애를 공감하는 독일인들과의 만남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서술했다. 또한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환호하며 소리 지르는 민중의 모습을 보고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잃어버린 세대가 아닌 새로운 세대에 살고 있다고 적었다

브라지야크는 프랑스를 이끌어 갈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검사로부터 더욱 큰 질타를 받았다. 검사는 다음과 같이 질책했다.

 

보통 사람의 배반보다 브라지야크와 같은 지식인의 배반이 수백 배 더 나쁘다.’

 

검사는 그를 단순한 나치협력 배반자보다 더 악질인 지성적 반역자로 규정했다. 그의 죄상을 볼 때 사형선고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문제는 많은 프랑스인들이 그의 사형선고에 찬성하면서도 그의 천재성이 안타깝다고 사면을 바랐다는 점이다. 또한 브라지야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가 독일로 도망갈 수도 있었음에도 프랑스에 남아 있었고 자수했다는 그의 용기를 높게 평가했다. 그는 나치협력신문 <새시대>의 편집국장이며 언론노조 회장인 쟝 뤼세르로부터 파리를 철수하는 나치독일군을 따라 독일로 피신하자는 제의를 받았지만 단연코 거부했다.

 

재판정의 브라지야크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체포되자 자수했다. 재판을 통해 그는 아래와 같이 반유대주의와 협력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피력했다

 

나는 인종에 대한 집단 폭력을 결코 찬성한 적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가족 그리고 자녀의 어머니를 떼어놓는 일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에 반대하여 독일이 행한 폭력적 행위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나의 반유대주의 사상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유대인 문제는 근대 국가와 서유럽 국가에서 현실적인 문제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다른 나라에서 흑인에 반대해 저지른 폭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폭력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재판관이 그에게 자신이 쓴 글에 대해 후회하느냐고 질문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내가 후회한다고 대답한다면, 내가 한 모든 행동은 내 목숨을 구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될 것이며, 그들은 정당한 권리로 나를 경멸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상황이나 사람들에 대해 잘못 생각할 수 있엇으나 내 행동에 대한 동기는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구명운동에 나선 알베르 카뮈>

나치부역자들의 청산을 강력하게 주창한 사람은 알베르 카뮈. 1947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두 번에 걸쳐 게슈타포에게 붙잡힐 위기를 넘기면서 레지스탕스 운동과 저항언론을 주도했다. 그의 다음 말은 나치 부역자 청산에서 금과옥조와 같은 말이다.

 

알베르 카뮈

 

누가 감히 나치협력자에게 용서를 말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칼은 칼에 의해서만 이길 수 있고 무기를 잡아야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디어 우리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감히 누가 이 진리를 망각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가? 내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기억을 기초로 하는 정의이다.'

 

시몬 드 보브아르

여류작가 시몬 드 보브아르는 브라지야크의 감형탄원서의 서명을 거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연대하는 작가 언론인들은 모두 나치독일의 게슈타포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레지스탕스 지식인들이다. 만일 내가 브라지야크에게 유리하게 손을 놀린다면 죽은 사람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을 것이 확실하며 그래도 나는 할 말이 없다.’

 

브라지야크 사면에 대해 논란이 가세되었는데 놀랍게도 알베르 카뮈를 비롯한 프랑스 지식인 59인은 드골에게 자신들이 서명한 진정서를 보냈다. 처형을 3일 남겨두고 그는 동료 문인들에게 사면운동에 대한 감사 인사와 더불어 자신의 행동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저를 사면시키기 위해 서명해주었던 프랑스 지식인, 문인, 예술인, 음악가, 대학의 관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제가 갚아야 할 빚이 너무 크지만, 서명 리스트를 통해 인간이 가지는 가장 훌륭한 특성을 (무엇인지) 보여 주었습니다. 그 리스트에 계신 분들 가운데는 작품이나 (정치) 활동에서 저와는 매우 거리가 멀어서 저에게 무관심해도 될 분들까지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서로 모르지만 저는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몇몇 분들에 대해, 저는 그들의 지지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들은 프랑스 문인들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아량을 베풀었습니다. (비록) 조국이 겪은 비극적인 상황에서 제 생각이 충격적이었겠지만, 제가 저지른 모든 오류가 결코 조국을 훼손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며, 좋은 나쁘든 간에 조국을 끊임없이 사랑했다는 것만큼은 확신합니다. 하여간 온갖 대립과 난관을 넘어서서 프랑스 지식인들은 저를 가장 영예롭게 해주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드골은 프랑스 지식인들의 탄원을 기각했고 브라지야크사형선고를 받은 지 약 2주 후에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이 외에도 베를린에서 독일방송을 위해 선전문의 작성을 담당했던 폴 페르도네, 독일 점령기간 동안 라디오 파리의 해설가로 이름을 날린 쟌 헤롤드-파퀴, 피에르-앙트완 쿠스토, 루시엔 레바테 등이 파리 재판소에 기소되어 모두 사형대를 지나갔다.

당시 부역 언론인에 대한 가혹한 처벌은 많은 논란을 낳기도 했다. 언론인들이 속죄양이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전후 처리의 지침과 같은 역할을 했던 대표적인 저항신문, 콩바의 편집국장 알베르 까뮈19458, 재판과정에 정치적 영향력이 개입해 마치 강제노역은 대수롭지 않은 처벌인 듯 많은 이들이 사형을 외쳐대고 있다면서 프랑스의 숙청작업은 실패다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자신이 주장한 엄정한 숙청작업과는 거리가 먼 숙청작업의 양상에 실망을 피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역언론의 전면적인 폐간 조치와 부역언론인의 처벌, 그리고 레지스탕스 언론의 부상은 프랑스 민주주의가 한발 더 나아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이러한 극단의 조치 이후 프랑스 언론계는 새 면모를 갖추었고, 민주적으로 재편성되었다고 설명되기 때문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문호 앙드레 지드도 숙청의 도마에 올려질 뻔했다. 앙드레 지드는 무엇보다도 저항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점에 대해 레지스탕스와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의심을 받았다.

 

앙드레 지드

우선 그는 프랑스가 나치독일에 점령된 후 남부 프랑스 자유지역으로 먼저 도피했다가 알제리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더구나 앙드레 지드는 나치독일 점령시절 파시스트로 광적인 나치찬양자가 편집장을 맡은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발간하는 잡지에 두 번이나 일기를 기고한 적이 있었다. 저항운동에 참여한 지식인과 작가들이 거의 모두 기고를 거부했는데 유독 지드만이 기고했기 때문에 더욱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다행스럽게도 지드는 더 이상 잡지에 기고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지드가 파시즘이나 나치즘을 찬양하는 글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재판에는 회부되지 않았다. 지드와 같은 지식인에 대해 숙청설이 오갔다는 것은 그만큼 언론인, 작가들에 대한 숙청이 철저했다는 뜻이다.

파리해방 직후 프랑스에서 최초로 응징된 나치협력자들은 모두 언론인들과 작가 등 지식인들이었다. 이와 같이 드골이 처음부터 지식인들을 숙청 대상자로 삼았기 때문에 나치협력자 숙청을 둘러싸고 야기될 수 있는 수많은 비판여론이나 문제점들을 간단하게 잠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