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협력자 청산을 위해 좌‧우 연합을 통한 거국내각>
프랑스 본토가 해방되기 시작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우선 파리의 레지스탕스와 시민봉기군은 연합군이 입성하기 전인 1944년 8월 25일 독일점령군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 장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히틀러는 파리철수 전에 파리를 폭파시키라고 명령했지만 콜티츠 중장은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하고 항복함으로써 파리를 구했다. 추후 콜티츠 장군은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7년형을 선고받았으며 독일에 돌아가지 않고 프랑스에서 여생을 보냈다.
드골은 다음날인 8월 26일 파리에 나타나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그런데 정가의 촉각은 임시정부의 수반이 된 드골의 생각이다. 당시 레지스탕스에는 공산당이 상당한 세력으로 참여했는데 유럽의 대표적인 우파 지도자인 드골이 공산주의자들과 연합할 수 있는가이다.
드골은 주저하지 않고 좌파를 거국내각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나치 부역자(collaborators)를 처벌하는데 좌‧우파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물론 드골은 공산당이 프랑스의 합법적인 정치공간에 합류하는 조건으로 혁명노선을 포기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공산당은 드골의 조건을 수락했다.
드골의 임시정부는 나치독일의 점령상태로부터 해방되는 지역마다 나치협력자 숙청을 우선적 과제로 삼아 집행하라고 요구했다. 드골은 나치협력자 숙청의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치협력자들은 정치적 결정, 주로 정치활동과 때로는 군사행동 그리고 행정조치 및 언론의 선정활동 등의 변화무쌍한 형태로 프랑스 민족의 굴욕과 타락뿐만 아니라 나치독일의 박해마저도 미화했다.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나치협력자들의 엄청난 범죄와 악행을 방치하는 것은 국가전체에 전염하는 흉악한 종양(腫瘍)들을 그대로 두는 것과 같다.’
그의 주장은 단순하다. 국가와 민족을 배반한 나치협력자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들이 만든 썩은 종양들이 종국에는 나라를 모두 부패시켜 프랑스를 망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당시 나치협력자로 규정된 사람은 다음 3가지였다.
① 자유박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프랑스의 패배를 악용한 투항주의자들
② 프랑스국민을 악의 길로 잘못 인도한 비시정권의 고위관료들과 추종자
③ 나치 독일의 승리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협력한 프랑스 사람
<정통성을 이어받은 임시정부>
드골이 독일 점령에서 해방된 지역부터 나치협력자들을 숙청하면서 프랑스의 정통성을 이어갔다고 하지만 그에게도 고민이 있었다. 우선 프랑스 국내에서 독일에 강력하게 저항하던 나치저항단체들도 어느 정도 강력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그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점은 미국 등 연합국이 드골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특히 미국은 시민 폭동과 같은 무질서 상황이 벌어진다면 프랑스가 독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지 않았다는 것을 구실로 군사정부의 설치할 가능성도 있었다. 더욱이 드골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는 것은 미국이 비시정권을 승인하면서 공식적인 수교관계를 맺는다면 거꾸로 비시정권이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드골에게 주어진 급선무는 프랑스 내의 반 나치저항단체들을 재빨리 포섭하면서 미국의 군정 계획을 무산시키는 것이다.
드골은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속한 조치를 취했다. 우선 페텡의 비시정권이 계속 연합국의 승인을 받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자신이 지휘하는 임시정부와 반 나치저항단체에 의해 ‘프랑스가 프랑스를 해방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도록 모든 조치를 취했다.
드골은 해방되는 지역에 곧바로 임시정부의 요원을 급파해 비시정권의 장악 하에 있던 지방행정기관을 먼저 접수했다. 어느 지역에서는 연합군이 점령하기도 전에 이미 드골의 요원들이나 지역 레지스탕스들이 기관을 접수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때 나치 부역자의 청산 중 가장 크게 지적되는 사건들이 일어난다. 프랑스가 단번에 해방된 것이 아니라 나치독일의 철수에 따라 단계적으로 해방되었기 때문에 드골의 임시정부에 앞서 해방 지역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나치부역자들을 숙청하는데 앞장섰다는 점이다. 일부 지방에서는 공산당 세력이 주력인 반 나치저항세력이 나치협력자에 대한 인민재판과 즉결처분을 시행하기도 했다.
해방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틱시에는 1944년 말과 1945년 초에 이르기까지 약식 처형된 자가 약 105,000명에 이른다고 보고했지만 1953년 당시 수상이자 내무장관이었던 앙리 퀘이으는 의회 위원회에서 약식처형자가 9,675명이었다고 보고하였다.
일반적으로 가장 신빙성 있다고 인정받는 것은 역사학자 로베르 아롱에 의해 수행된 조사로 그는 1944년 6월부터 1945년 5월까지 프랑스에서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총살되거나 학살된 남녀는 3만에서 4만 명에 이른다고 결론 내렸다. 또한 부역행위로 인해 재판과 선고를 거쳐 처형된 사람은 779명이라고 발표했다. 물론 이 숫자 역시 당시의 상황을 볼 때 정확한 숫자로 볼 수 없으므로 최소한 1만 명 이상이 약식 처형되었다고 추정한다.
이와 같은 반 나치저항 단체들의 나치협력자들에 대한 처단은 새로 태어난 임시정부의 법이라는 테두리 즉 임시정부의 공권력 하에서 시행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것은 드골의 임시정부 세력과 반나치 저항세력과 내분이 일어날 소지가 다분히 있었고 그러한 내분은 미국이 프랑스를 군정 하에 두어야 한다는 빌미를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드골은 나치협력자 숙청에 관한 한 정부의 업무를 강조하고 프랑스의 법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정통성은 사법을 담당하는 사람의 권위와 책임 하에 이뤄지는 정통 사법기구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조직적이고 체계화된 임시정부 조직이 가동된다면 미국과 영국이 프랑스를 넘볼 수 없다는 것이 드골의 생각이었다.
결론적으로 드골은 성공했다. 대내적으로 나치협력자를 숙청해 새로운 민주사회를 건설하고 대외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으로 인정받아 강대국의 지위를 다시 확보한 것이다. 드골이 여러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어려운 상황 하에서도 나치협력자 세력을 철저히 소탕해야 한다는 대전제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지식인의 배반의 엄중성>
드골이 나치 부역자의 청산에 있어 가장 먼저 시도한 곳은 언론 부분이다.
프랑스는 ‘톨레랑스(tolerance)' 즉 관용의 나라로 널리 알려진다. 18세기 계몽사상가 볼테르(Voltaire)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프랑스도 2차 세계대전 때의 나치부역자에게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그런데 이러한 프랑스가 전통적인 관용을 베풀지 않았음에도 드골이 나치협력자 청산에 있어 상당수 프랑스인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나치부역자들에 대한 설득력 있는 순차적인 처리 때문이다. 그가 제일 먼저 도마 위에 올린 사람은 언론인들을 포함한 지식인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독일이 점령한 유럽의 수도는 8곳이나 된다. 독일은 점령당국에 협조하도록 만들기 위해 무력과 설득, 매수 등 온갖 가능한 방법을 동원했는데 그 과정에서 언론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독일은 프랑스의 경우 상당히 놀라운 정책을 견지했다. 우선 새로운 신문보다는 종래의 신문을 계속 발간케 하되 일정 부분을 점령당국의 요구에 할애토록 하는 것이다. 나머지 지면 즉 정치와 관련없는 문화비평, 스포츠, 행사 등은 종전처럼 얼마든지 할애하도록 허용하였다.
드골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점령당국의 요구에 부응한 언론인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드골은 제일 먼저 언론인과 지식인들을 올린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론인들은 도덕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지식인과 작가는 사과로는 안 되고 반드시 책임을 물려야 한다’
드골의 지식인에 대한 굳은 의지는 그의 『전쟁회고록』에서 저명한 작가들을 포함한 지식인들을 숙청해야 하는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천명한데서도 알 수 있다.
‘예술가가 가장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선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악에 대해서도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반대 진영을 선택한 작가들에 대해서 우리는 그들의 자극적 웅변술이 어떠한 범죄와 어떤 벌에 해당되는지를 너무나 잘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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