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미국 법무부는 62년 가까이 미국에서 산 95세 노인을 독일로 강제 추방했다. 2차 세계기간 중 나치 수용소에서 일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테네시주에서 살던 프리드리히 카를 베르거는 지난 1945년 독일 나치수용소에서 경비원으로 일한 사실이 밝혀져 독일로 추방됐는데 이는 수용자들이 탄 침몰선에서 베르거의 복무 기록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19살에 불과하여 명령만 받았을 뿐이라는 베르거의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베르거가 당시 전역을 요청하지 않았으며 독일로부터 전시 근무에 따른 연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미국이 나치의 반인륜적 범죄에 참여한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추방 이유를 설명했다.
한국에서 친일파 진상 규명 등 과거청산 문제가 대두되었지만 독일의 나치 통치를 겪었던 유럽의 각 국에서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프랑스, 벨기에,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 독일에 점령되었던 각 국이 독일의 치하에서 벗어나자마자 나치 협력자들을 철저하게 처리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해국인 독일조차도 1946년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 등을 통해 나치지도부를 숙청했다. 서독이 영국과 프랑스 등 승전국과 동등한 자격으로 서방국의 대열에 성공적으로 합류할 수 있었던 것도 각 국에 큰 피해를 준 나치전범을 철저히 사법 처리하여 후유증을 최소한으로 줄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나치 협력자 청산의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는 프랑스에 관해서만 설명한다. 본고의 많은 부분을 언론인 주섭일의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에서 인용했음을 밝힌다.
<프랑스의 패배와 비시정권의 수립>
1938년 루드비히 벡크 독일 합참의장은 프랑스 군대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라고 경고한 바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프랑스 군대가 1940년 5월 10일 전쟁이 시작된 이래 6주만에 맥없이 무너졌는데 이는 독일의 기상천외한 프랑스 국경 우회작전 때문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히틀러는 프랑스를 침공하는데 절묘한 아이디어를 사용했다.
프랑스는 독일이 폴란드 등을 전격적으로 점령하여 파란을 일으켰음에도 적어도 독일이 프랑스를 직접 침공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더구나 독일이 공격하더라도 그들의 공격을 간단하게 격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것은 독일 국경에 면한 요충지에 프랑스가 자랑하는 마지노선이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마지노선을 건드리지 않고 벨기에와 프랑스 국경의 틈새인 아르덴 숲을 돌파하는 묘수를 사용했다. 독일은 1940년 5월 10일 네덜란드 국경을 넘어 공격했고 네덜란드는 1940년 5월 15일 항복했다. 곧이어 5월 28일 벨기에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어서 유럽 대륙에 남아 있던 연합군 34만 명이 덩케르크 해안에서 6월 4일 철수함으로써 프랑스를 빠져 나가자 곧바로 6월 6일 프랑스 파리를 향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6월 10일에는 이탈리아가 대프랑스 선전포고를 했다.
프랑스는 히틀러가 중립국을 우회하여 공격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의 승패는 이미 결정 난 셈이다. 프랑스 정부가 르와르 강 하류로 철수하자 6월 14일, 히틀러의 군대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개선문과 샹젤리제 거리를 행진했다. 이어서 프랑스의 중앙 지역인 보르도까지 쫓겨온 프랑스 내각은 항복과 항전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주요전력과 북부의 공업중심지가 상실되어 전의가 상실된 레이노 수상은 북아프리카로 거점을 옮겨 항전할 것을 주장했다. 반면에 페텡 원수는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 땅을 떠나는 것에 극력 반대하였다.
휴전파와 항전파의 논쟁이 치열하던 상황에서 1940년 6월 16일 당시의 레이노 수상이 사임하고 대신 페텡원수가 취임하였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베르덩 전투의 영웅이면서 당시 스페인 대사로 나가있다가 급거 귀국하여 부수상을 맡고 있던 페텡은 프랑스가 끝까지 싸워 완전한 몰락에 이르기 보다는 일부의 프랑스 군대라도 잔존하여 질서를 유지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당시 그는 프랑스가 제2의 폴란드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페텡은 패배를 인정하고 독일과의 휴전협상에 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프랑스 본토의 포기는 적에게 프랑스를 넘겨주고 그 영혼을 파괴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강변했다.
‘정부가 휴전에 이르지 못하면 프랑스 군대는 명령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공포에 빠질 것이다. 프랑스 본토의 포기는 적에게 프랑스를 넘겨주고 그 영혼을 파괴한다. 프랑스의 영혼은 프랑스에 남음으로써 유지될 수 있고 연합국의 대포와 함께 재정복함으로써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페텡의 주장은 간결하다. 프랑스인이 일단 프랑스를 떠나면 다시는 프랑스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휴전파를 기반으로 내각을 구성한 페텡은 수상으로 지명받은 지 몇 시간 이내에 독일에 대하여 휴전을 제의하였다. 독일도 나름대로 계산했다. 독일로서는 영국과의 전쟁을 예상하여 영국의 고립, 프랑스의 함대와 식민지를 중립화시키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하여 지나치게 가혹한 항복조건 보다는 프랑스 정부의 주권 존속을 인정하고 부분적으로 점령을 실시하는 안을 받아들였다. 6월 22일 독일대표단과 프랑스측 사이에 휴전협정이 성립되었고 페텡은 6월 25일, 다음과 같이 대국민 방송을 했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전쟁은 끝났다. 우리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조건들이 엄중하지만 다행히도 명예는 구조되었다. (중략) 우리들은 본국과 식민지에 있어서 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육해군 부대를 보유하고 있다. (중략) 프랑스는 프랑스인에 의해 통치될 것이다.’
프랑스인을 통치할 프랑스인의 정부가 수립되었는데 바로 비시 정권이다. 프랑스 남부의 한 휴양도시인 비시를 전시수도로 정한 비시 정권은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다. 독일의 점령 전 구성된 의원과 내각의 각료들 3분의 2정도가 비시 정권에 참여했다.
페텡은 1875년의 헌법을 비상 전시 기간 동안 정지하는 한편 포고령(Decree)에 의해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라발은 ‘의회민주주의는 나치즘과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이제 사라져야 한다. 새로운 정부는 단호하고 권위적이며 사회적이고 국가적이어야 한다’면서 프랑스 국가의 새로운 헌법을 공포할 완전한 권력을 공화국 정부에 부여하는 수정안을 제의하였다. 라발의 안이 압도적으로 통과되고 새로운 헌법에 의해 국가주석의 권한은 전제군주인 루이 16세보다 더 강력하게 규정되었다. 1940년 7월 10일 페텡은 국가주석으로 취임하였고 라발은 부주석이 되었다.
<휴전협정하의 두 개의 정권>
6월 22일 나치독일과 프랑스의 페탱 원수 간에 조인된 휴전협정에서 패전국 프랑스는 휴전협정에 의해 남북으로 분리되었다. 르와르 강 북부의 프랑스 즉 전국토의 55퍼센트는 나치 독일이 직접 점령하고 남부 프랑스는 페텡이 중부 휴양도시 비시에서 비시정부를 구성해 통치하기로 했다.
북부 점령지대는 파리와 프랑스의 가장 풍요로운 지방을 포함한다. 이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독일은 파리에 본부를 두고 카이텔 원수를 군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행정 분야에서 프랑스 정부의 주권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휴전협정 제3조에 의해 독일당국에 정보를 제공 등 협력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반면에 남부의 자유지대에는 비시정권에 완전한 통치권이 위임되었다. 물론 독일측의 감시위원회가 설치되어 자유지대의 지방관청에서의 관보 발행의 검열, 중요 공무원의 임명권을 장악했다.
1942년 11월 이후에는 자유지대조차 사실상 점령하고 말았기 때문에 직접 점령지역과 자유지역 사이의 구별이 없어졌다고 볼 수 있지만 2년 반 정도 남부는 자유지역이었다. 독일로 보아 이곳이 북부의 점령지역에 있는 레지스탕스 등에 대한 공급지이므로 자유지대를 폐지한 것은 예상된 일이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프랑스정부가 휴전협정에 따른 의무를 위반하면 독일은 언제라도 휴전협정의 파기를 통고할 수가 있었으므로 독인을 이를 빌미로 자유지대를 폐지한 것이다.
알사스 로렌 지방은 독일에 병합되었다. 이 지역이 독일에 병합된 것은 탄광 등 에너지원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일은 이들 지역을 완전 독일화하기 위해 주민에 대한 강제퇴거를 추진했고 프랑스어 사용을 금지했다. 유명한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 나온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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