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나치 부역자 청산 9

유럽의 나치 부역자 청산(9)

⑥ 클라우스 바르비 재판 미테랑 대통령의 사회당 정부는 1983년 레지스탕스 영웅 장 물렝을 고문 살해한 리용지역 나치 게슈타포의 바르비를 남미 볼리비아에서 체포해 재판했다. 벨기에와 네델란드 레지스탕스에 대한 잔혹한 탄압을 인정받아 1942년 11월 프랑스로 차출되어 1942년부터 1944년까지 리용에 주둔한 SS특별부대를 지휘했다. 바르비가 볼리비아에 있다는 것을 파악한 프랑스 정부는 1972년 이후 10여 년 동안 계속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계속 여의치 않다가 볼리비아에서 좌파정권이 들어서면서 송환은 현실화되었다. 범죄로부터 40년만의 기소였다. 바르비에게는 프랑스에서 사형이 폐지되었으므로 무기징역형이 선고되었고 감옥에서 사망했다. ⑦ 폴 뚜비에르 폴 뚜비에르는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청산에 큰 소용돌..

유럽의 나치 부역자 청산(8)

https://youtu.be/HFCjT8OL3fc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은 속전속결이 특징이다. 최고재판소가 형식적이나마 1960년까지 운용되었지만 대부분의 숙청은 1951년에 종지부를 찍어 단 6년 만에 숙청재판을 종결했다. 프랑스의 연감 『퀴드』 2003년 판은 나치협력자 청산결과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치협력자 조사대상 150만~200만 명, 체포되어 조사 받은 자 99만 명, 최고재판소와 숙청재판소에서 재판된 사건은 57,100여 건, 6,766명에 사형선고, 782명 사형집행, 2,802명에게 유기징역형, 3,578명에 공민권 박탈했고 시민재판소에서 11만5천 건을 재판에 9만5천 명에게 부역죄을 선고받았고 공직자 12만여 명은 시민재판소에서 행정처분을 받았다. 재판 받은 사람들은 군대 ..

유럽의 나치 부역자 청산(7)

https://youtu.be/HFCjT8OL3fc 언론사의 경우도 예외가 없었다. 나치점령군과 비시정권의 지시와 규정에 순종한 언론사는 물론 나치독일의 프랑스 점령이후 창간된 모든 신문과 잡지들을 대상으로 소유주가 재판을 받는 경우 모두 발행 금지시켰다. 또한 소유주가 실형을 받으면 그 언론사는 곧바로 폐간되었다. 물론 문학과 스포츠 등 정치성이 전혀 없는 전문지는 이 조치에서 제외되었다. 신문사에 대한 재판은 1945년 말부터 시작되었는데 1948년 말까지 모두 538개 언론사들이 재판에 회부되어 이중 115개 사가 유죄선고를 받아 폐쇄됐고 64개 사가 전 재산 몰수, 51개 사는 일부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30개 언론사만이 무죄선고를 받았다. 전쟁 전부터 발행되던 유력 신문사 중 살아남은 것은 , ,..

유럽의 나치 부역자 청산(6)

https://youtu.be/HFCjT8OL3fc 추후에 나온 자료에 의하면 드골은 자신의 군 대선배인 페텡 원수가 재판에 회부되지 않도록 배려한 흔적이 있다. 우선 히틀러는 나치독일군대를 프랑스에서 후퇴시키면서 페텡을 독일로 납치해 시그라린겐의 성에 인질로 잡아놓고 친나치망명정부의 수립을 강요했다. 그러나 페텡은 일거지하에 히틀러의 망명정권 수립요구를 거절하고 히틀러에게 프랑스로 보내달라고 계속 요청했다. 드골은 『전쟁회고록』에서 시그라린겐 성에 접근하던 프랑스군 드 라트르 장군이 페텡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적었다. “페텡과 비시의 장관들을 발견하면 어떻게 할까요?” “모두 체포하시오. 그러나 나는 페텡 원수를 만나고 싶지 않소.” 학자들은 드골이 이 말을 한 진정..

유럽의 나치 부역자 청산(5)

https://youtu.be/HFCjT8OL3fc 드골이 주도하는 프랑스 임시정부가 나치협력자 청산을 순조롭게 진행시키고 있었지만 문제는 비시정권의 수반이자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거물 페텡 원수의 처리였다. 페텡은 1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 패배를 안기면서 프랑스에 승리를 선사한 전쟁영웅으로 프랑스와 유럽에서 존경을 받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 페텡은 안보담당 부총리였고 를 창설한 드골은 임명된 지 얼마 안 되는 육군 소장으로 국방차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하자 두 사람의 운명은 완전히 갈라진다. 드골은 독일과 끝까지 싸우자는 항전파였고 페텡은 타협하여 프랑스를 지켜야한다는 투항파였다. 반면에 드골은 괴뢰 비시정권의 수장인 페텡을 반드시 재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럽의 나치 부역자 청산(4)

https://youtu.be/HFCjT8OL3fc 일반적으로 파리숙청재판정에 처음으로 끌려나온 나치협력 지식인은 조르주 쉬아레즈로 알려진다. 그는 전쟁 전에 유명한 클레망소와 페텡의 전기를 쓴 역사가였으나 나치점령시절 친 비시정권 일간지 의 정치부장으로 그가 쓴 103건의 기사가 프랑스 형법 제75조의 반역죄로 기소되었다. 검사는 쉬아레즈를 비롯하여 나치선전원으로 전락한 조국배반 언론인들을 준엄하게 심판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쉬아레즈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자 ‘프랑스를 방어해 주는 나라는 독일뿐’이라고 기사화했고 영국과 드골의 도발자들이 폭격을 감행하면 나치로 하여금 유태인, 공산주의자, 프랑스 거주 미국인과 영국인을 인질로 잡아 대항하자고 말했다. 그의 죄상이 워낙 명백하므로 변호인은 ‘나치독일..

유럽의 나치 부역자 청산(3)

https://youtu.be/HFCjT8OL3fc 프랑스 본토가 해방되기 시작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우선 파리의 레지스탕스와 시민봉기군은 연합군이 입성하기 전인 1944년 8월 25일 독일점령군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 장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히틀러는 파리철수 전에 파리를 폭파시키라고 명령했지만 콜티츠 중장은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하고 항복함으로써 파리를 구했다. 추후 콜티츠 장군은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7년형을 선고받았으며 독일에 돌아가지 않고 프랑스에서 여생을 보냈다. 드골은 다음날인 8월 26일 파리에 나타나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그런데 정가의 촉각은 임시정부의 수반이 된 드골의 생각이다. 당시 레지스탕스에는 공산당이 상당한 세력으로 참여했는데 유럽의 대표적인 우파 지도자인 드골이 공산주..

유럽의 나치 부역자 청산(2)

https://youtu.be/HFCjT8OL3fc 독일의 프랑스 침략에 의해 비시 정권이 탄생했지만 합법성에 대해서는 당초에는 별다른 의문이 없었다. 프랑스 국민들은 비시정권이 비록 독일에 사실상 항복한 후 등장한 정부이지만 그 자체가 무효인 정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형식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비시정권은 당시의 제3공화국 헌법에 따라 구성된 합법적인 정권이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항복보다는 독일과 비시 정권의 휴전협정의 결과가 보다 프랑스에 이익을 안겨준다는 것은 큰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적국으로 규정된 독일의 점령의 목적에도 부합된다는 구조적 모순을 갖고 있었다. 1351년의 영국 에드워드3세는 반역행위를 적에 대한 부역의 형태로 규정했다. 그런데 이를 적용하면 프랑스의 비시..

유럽의 나치 부역자 청산(1)

https://youtu.be/HFCjT8OL3fc 2021년 2월, 미국 법무부는 62년 가까이 미국에서 산 95세 노인을 독일로 강제 추방했다. 2차 세계기간 중 나치 수용소에서 일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테네시주에서 살던 프리드리히 카를 베르거는 지난 1945년 독일 나치수용소에서 경비원으로 일한 사실이 밝혀져 독일로 추방됐는데 이는 수용자들이 탄 침몰선에서 베르거의 복무 기록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19살에 불과하여 명령만 받았을 뿐이라는 베르거의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베르거가 당시 전역을 요청하지 않았으며 독일로부터 전시 근무에 따른 연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미국이 나치의 반인륜적 범죄에 참여한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추방 이유를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