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나치 부역자 청산

유럽의 나치 부역자 청산(8)

Que sais 2021. 7. 10. 21:22

https://youtu.be/HFCjT8OL3fc

<프랑스보다 철저한 유럽 점령국의 나치부역자 청산>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은 속전속결이 특징이다. 최고재판소가 형식적이나마 1960년까지 운용되었지만 대부분의 숙청은 1951년에 종지부를 찍어 단 6년 만에 숙청재판을 종결했다.

프랑스의 연감 퀴드2003년 판은 나치협력자 청산결과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치협력자 조사대상 150200만 명, 체포되어 조사 받은 자 99만 명, 최고재판소와 숙청재판소에서 재판된 사건은 57,100여 건, 6,766명에 사형선고, 782명 사형집행, 2,802명에게 유기징역형, 3,578명에 공민권 박탈했고 시민재판소에서 115천 건을 재판에 95천 명에게 부역죄을 선고받았고 공직자 12만여 명은 시민재판소에서 행정처분을 받았다. 재판 받은 사람들은 군대 장교 42,000여 명, 정부 관료 28,750, 경찰간부 170, 판검사 334, 헌법위원 18명이다.‘

 

드골의 회고록 

 

그러나 나치협력자 숙청결과는 이보다 더 많다는 것은 정설 아닌 정설이며 드골도 회고록에서 적어도 1만 명 이상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물론 서슬이 시퍼랬던 나치협력자 청산도 시간이 지나면서 부드러워져 최초에 선고된 형량을 모두 채우는 나치협력자들은 점차 줄어들었다. 1951년에 이미 강제노동형 수형자 406명이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나치협력자들이 일부 가석방의 은전을 받아 풀려났더라도 사회에서 부역죄라는 형벌이 계속 발목을 잡아 정상 활동이 불가능했다. 피선거권은 말할 것도 없고 투표권도 박탈당했으며, 공직은 물론 언론이나 국영기업체에도 진출이 차단됐다.

폭풍우와 같았던 나치부역자들에 대한 재판이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이들에 대한 사면 요구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사면의 당위성으로 프랑스인들의 관대함, 국가적 화해, 점령기간 동안에 범해진 범죄의 일정한 정치적 성격, 이탈리아와 독일에서의 화해정책의 선례 등을 꼽았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195115일의 통과된 최초의 사면법은 공민권박탈판정을 받았거나 15년 이하의 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모두 사면하는 내용이었다. 동시에 이 법은 강제로 징용되었거나 21세 이하의 청소년이었거나 대부분의 형기를 채운 사람들에 대한 구제도 포함하고 있었다. 물론 중대한 범죄나 고등법원의 결정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19527월에는 국가적 일치라는 기치를 내걸고 보다 총체적 사면을 약속하는 제안이 나왔다.

이들은 4공화국'은 이해와 인간성을 보여줄 만큼 충분히 강력하며 가중되는 위기 속에서 모든 프랑스 국민의 단합이 그 어느 때 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특히 조국이 내일 위험에 처한다면 그 방위를 위하여 프랑스의 모든 자녀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결국 19537월 두 번 째의 사면법도 통과되었고 특별히 심각한 범죄를 제외하고 당시까지도 복역하고 있던 부역자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사실상 이 법에 프랑스의 부역자에 대한 처단은 끝이 났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가 공식적으로 해방된 1945년을 기산으로 한다면 8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부역자 문제를 처리한 것이다.

 

<프랑스 외 나치점령국의 나치 부역자 숙청>

드골의 숙청은 벨기에,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의 숙청에 견주어 보면 오히려 온건한 청산이라는 평가도 있다. 사실 사형이 집행된 나치협력자는 프랑스가 수적으로 가장 많지만 강제노동형이나 징역형을 받은 나치협력자는 인구비례로 볼 때 프랑스가 가장 적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물원 사자 우리에 갇힌 벨기에 나치 협력자(1944년 9월)

프랑스에서 38,000여 명에게 징역형이 선고되었는데 이는 인구 10만 명당 평균 94이 감옥에 간 것을 뜻한다. 반면에 덴마크의 경우, 14,000 명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는 인구 10만 명당 평균 374이며, 네델란드의 경우 10만 명당 419, 벨기에의 경우는 10만 명당 596, 노르웨이10만 명당 633이다. 노르웨이는 프랑스에 비해 무려 6.6배나 더 많은 수치를 나타냈다.

유럽에서 나치점령을 경험한 국가는 프랑스만은 아니지만 부역자처리에 적절한 반역죄 등 처벌에 관해 전쟁 전 입법을 통하여 갖추고 있는 나라는 없었다. 그러므로 노르웨이, 네덜란드, 덴마크에서는 소급입법과 금지된 사형을 재도입하여 이들을 처리했다.

 

레지스탕스에게 체포된 나치병사들과 관계한 네덜란드 여성들

나치협력 민족반역자를 가장 철저히 응징한 나라는 노르웨이로 모두 92,000여 명에 대한 민족반역 혐의를 수사하여 그중 절반이 넘는 47,500이 최소한 벌금형 이상의 형을 선고받았다. 노르웨이는 사형이라는 극형을 선고하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숙청처럼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모으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단없는 나치부역자 청산>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은 드골 시대로 모두 끝난 것은 아니다. 프랑스는 1964년대에 자국형법반인도적 범죄에 관한 법을 병합해 국가반역죄와 반인권범죄 및 인종차별범죄에 관해 시효가 없이 체포해 재판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했다.

반인도적 범죄정치적, 인종차별적 및 종교적 목적으로 시민을 살해, 몰살, 노예화 및 유형에 처하거나 고문하는 등 박해를 가하는 범죄로 정의되는데 이 법은 서유럽 선진 민주국들이 모두 자국 형법에 편입시켜 일반화되었다고 주섭일 박사는 설명했다. 드골의 폭풍같은 나치부역자 처벌을 지나 추후에 반인도적인 범죄로 재판받은 나치부역자 또는 점령 중의 비인도적 범죄 등으로 기소되거나 사건화된 중요 사례는 다음과 같다.

 

오란두-씨르-그란(Oradour-sur-Glane) 사건

오란두-씨르-그란 마을에서 642명의 주민을 학살한 혐의로 전 SS대원이었던 프랑스 병사 21이 기소되었다. 그러나 이들 병사들은 알사스 지방 출신인데다 그중 12명은 강제 징용된 병사들이다. 이들은 당초 SS를 탈주하여 레지스탕스 등에도 가담하였다가 해방을 맞아 기소되었으나 기각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있던 중 1948915일의 소급법에 의해 다시 기소된 것이다. 당연히 희생된 주민들의 가족들은 엄벌을 요구하였고 그 병사들의 고향인들은 피고들이 강제징용된 희생자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았으나 강제징용자에 대한 사면 법안이 제출되는 계기가 되었다.

 

로베르 에르쌍(Robert Hersant) 사건

19564월경 하원의원 쟝 르장드르(Jean Legendre)로베르 에르쌍의 당선이 무효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에르쌍이 1941년 브레반느에서 '페텡청년센타'의 책임자가 되고 이어 쥔느훠쓰(Jeunnes Forces)라는 신문을 발행하였으며 부역신문에 여러 차레 기고한 죄목이다. 1945년 구속되었다가 곧 풀려났고 1947년에는 10년 동안 공민권이 정지되었다. 1952년 사면되었는데 과거의 부역사실이 드러나 125 : 11의 결의로 그는 의석을 박탈했다. 그러나 1956그는 다시 선출되었는데 프랑스에서도 시간이 약임을 알려준다.

 

③ 폴 모랑(Paul Morrand) 사건

모랑 사건1958'프랑스학술원(Academie Francaise)에 관한 스캔들이다.

그는 직업외교관으로서 비시정부 하에서 루마니아, 스위스 대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해방이 되자 외교관인 대사에서 해임되었는데 1953년 최고행정재판소는 위의 결정을 취소했고, 2년 뒤 모랑은 외교관으로 복직되었다.

그런데 그가 프랑스학술원 위원으로 추천되자 레지스탕스 출신들이 항의했다. 그는 프랑스의 항복 이전부터 나치독일과 일정한 관계를 가져왔고 항복 이후에도 점령당국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더불어 그가 민병대의 기관지인 <콩바(Combats)>에 많은 글을 기고하였다.

그런데 모랑이 입회를 원한 프랑스학술원은 사실상 페텡주의자들이 많이 포진한 곳으로 이곳의 멤버였던 페텡은 축출되기도 했다. 1944년부터 주로 레지스탕스와 연결된 작가 등이 선출되었는데 여전히 페텡주의자 그룹이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비시 정부의 모랑 선출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1958년에는 입회가 거절되었으며, 1959년에는 자진 철회했으나 1968년 다시 도전하여 입회가 허락되었다.

 

프랑스 학술원에 선정된 폴 모랑

다르퀴에 사건

1978<렉스프레스>지에서 1942년에서 1944년까지 비시정권의 유태인 책임자로 일했던 다르퀴에를 인터뷰한 내용이 연재되었다. 다르퀴에는 194712궐석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스페인으로 망명하여 스페인의 프랑코 총통의 지원을 받아 스페인에서 안주하고 있었다. 그는 이 인터뷰를 통하여 여전히 인종주의 시각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프랑스 국내의 '비시 신드롬'을 일으켰다. 결국 법무장관이 다르퀴에의 송환을 요구하였지만 19808월 사망할 때까지 아무런 기소가 행해지지 않았다.

 

진 레구아이 사건

19794월 치안판사 마르틴 안자니가 69세의 진 레구아이를 기소했다. 그는 1942년부터 1943년 사이에 르네 부스케 휘하의 비시경찰의 독일점령지역 대표하면서 프랑스 영토에서의 유태인 추방에 책임을 지고 있었다. 1945년 내무성의 숙청위원회에서 그에게 공직추방을 명했지만 1955년의 국무원에 의해 번복되어 기업가로 변신했다. 심지어 유명 향수회사의 미국지점장으로 10년이 넘게 근무하였고 사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1979년 기소되어 법정에 다시 서게 되었지만 재판은 지지부빈하여 무려 10년 후인 1989년 재개되었으나 곧바로 사망하여 형평성 논란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