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기를 맞은 페텡의 재판>
드골이 주도하는 프랑스 임시정부가 나치협력자 청산을 순조롭게 진행시키고 있었지만 문제는 비시정권의 수반이자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거물 페텡 원수의 처리였다.
페텡은 1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 패배를 안기면서 프랑스에 승리를 선사한 전쟁영웅으로 프랑스와 유럽에서 존경을 받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 페텡은 안보담당 부총리였고 <자유프랑스>를 창설한 드골은 임명된 지 얼마 안 되는 육군 소장으로 국방차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하자 두 사람의 운명은 완전히 갈라진다. 드골은 독일과 끝까지 싸우자는 항전파였고 페텡은 타협하여 프랑스를 지켜야한다는 투항파였다.
반면에 드골은 괴뢰 비시정권의 수장인 페텡을 반드시 재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페텡이 가짜정부를 구성해 수반에 취임하면서 나치독일에 굴욕적으로 항복했고, 민주헌법을 훼손했으며, 적을 지원하기 위해 프랑스 노동자들을 독일로 보냈고 연합군과 반나치 투쟁을 계속하는 ‘정의의 프랑스’에 대항해 프랑스군을 싸우게 하는 반역죄를 범했다는 논지였다.
그런데 페텡에 대해서는 많은 프랑스인들이 존경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 걸림돌이었다. 페텡이 독일과 휴전을 제시한 것은 전력이 떨어지는 프랑스가 독일 기갑사단에 맞서 싸운다면 프랑스의 피해만 커지므로 히틀러와 휴전협정을 통해 일단 숨을 돌릴 시간이 필요하다는 논지였으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프랑스를 살려놓은 시각도 많았다.
페텡은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으면서 미국과는 외교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등 상당히 현명한 외교정책으로 프랑스를 제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벗어나 중립지대로 남아있게 만들었다. 특히 히틀러의 동반자 또는 나치 독일의 괴뢰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군과의 전쟁을 피하는 슬기도 보여주었다.
또한 페텡이 재빨리 독일과 휴전협정을 체결했기 때문에 프랑스 국토를 나치 기계화 부대의 포화로부터 구출했다는 점도 프랑스인들은 잊지 않았다. 더구나 페텡은 미국과 비시정권말기까지 외교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연합군의 일원으로 나치독일과 싸운 드골의 자유프랑스군과 민족상쟁의 전투를 피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드골의 주장은 많은 프랑스인들이 인정하고 있던 나치독일과 휴전협정을 통해 프랑스를 구출했다는 비시정권의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는 논리였다. 특히 드골이 페텡을 반역자로 심판해야 한다고 주장할 당시에 페텡은 반쪽이기는 하지만 프랑스를 대표하는 국가의 수반으로 봉직하고 있었다.
더욱 프랑스인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페텡 원수가 나치협력 민족반역자로 규정되면 비시정권의 각료들과 공직자들 모두 나치협력자로 낙인찍히는 것이 된다는 점이다. 프랑스에 있는 프랑스인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드골의 정책에 반기를 든 이유이다.
그러므로 드골의 나치협력자 숙청 계획은 현실을 잘 모르는 독선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도 많았다. 비시정권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은 물론 아직 독일과 전쟁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전쟁이 끝난 후 새 사법부와 새로운 법체계에 의해 나치협력 민족반역자를 응징하는 것이 순리라는 것이다.
여하튼 페텡은 히틀러와 휴전협정을 체결해 프랑스 북부는 나치 독일이 점령하지만 자신은 중부에 있는 도시 비시에 소위 페텡의 <국민정부>를 수립해 프랑스인의 정부로서 프랑스 남부를 통치할 수 있었다.
페텡이 체포되어 민족반역자로 재판정에 서자 페텡은 나치 독일 점령시절인 4년 간 드골이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싸웠다면 자신은 프랑스 안에서 싸웠고 프랑스를 그나마 지켜낸 것은 비시 정부의 공이라고 말했다.
‘나는 4년 이상이나 매일같이 프랑스의 영원한 이익을 위해 봉사하려 하였다. 충성스럽게 그러나 한점의 타협도 없이 나는 단지 하나의 목표만을 가졌다. 바로 프랑스를 최악으로부터 보호한다는 것이다. (중략) 만약 내가 프랑스의 칼이 될 수 없다면 나는 바로 방패라도 되려고 하였다.’
<방패이론으로 옹호>
페텡은 비시 정권이 프랑스의 '폴란드화'를 막았다는 것을 실증적인 방법으로 변호했다. 즉 방패이론의 다양화이다.
‘나는 나의 권력을 프랑스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로 사용하였다. 매일같이 나는 적군의 요구에 대항하여 싸웠다. 나의 적은 단지 나를 공격하는 데 여념이 없겠지만 역사는 내가 국민을 위해 했던 모든 것을 말할 것이다. (중략) 드골 장군이 우리의 국경 밖에서 투쟁하였다면 나는 프랑스 즉, 고통당하였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프랑스를 보존함으로써 해방을 위한 길을 준비하였다.’
즉 드골이 나라 밖에서 프랑스의 칼을 높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프랑스 국민의 방패를 들었다는 주장이었다. 비시 정권의 라발 총리 역시 고등법원에서 그의 정부가 정복자와 프랑스 국민 사이의 '스크린'으로서 기능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비시정권이 비록 정복자인 나치독일의 보호 하에 있었지만 '스크린' 또는 '방패'가 되어 프랑스 국민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줄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중요한 것은 상당수 프랑스인들의 당시 삶이 다른 유럽 정복민들보다는 여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유명한 역사학자 로베르 아롱 박사는 통계적으로 볼 때 이런 생각에 동조하였다. 비시 정권에 대한 공격은 물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도덕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방패이론에 곧바로 공격이 시작되었다.
우선 프랑스가 독일과의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그 점령 목적에 협조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다른 직접 점령국보다 덕을 보았는가에 대한 부정적인 자료들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히틀러가 ‘잡을 것이 있는 모든 것을 잡아라’라는 정책을 기조로 독일점령군은 징발의 권한을 남용하면서 엄청난 숫자의 선박 압류, 철도 재고의 3분의 1 장악, 모든 석유의 재고와 군용을 위한 식품을 징발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프랑스의 생산 가동율이 50% 정도로 떨어졌다는 지적이다.
사실 프랑스는 전통적인 농업국가로 전쟁 전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앞선 농업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점령 중 국민의 1일 칼로리 섭취량은 동서 유럽을 포함하여 이탈리아를 제외하고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프랑스의 독일점령군과 독일 본토로의 식품 공급이 폴란드보다 더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독일 지도자들은 노골적으로 프랑스 노동자의 임금이나 생활수준이 독일보다는 나아서는 안 된다고 언명하였다는 주장도 나왔다. 더구나 비시정권이 프랑스와 국민의 방패는커녕 그들을 향한 '흉기'가 된 점도 지적되었다.
레지스탕스를 비롯한 프랑스 애국자들을 처형 등에 앞장선 민병대의 존재이다. 1941년 봄에 다르낭에 의해 창설된 프랑스전사단보안대(SOL)가 1943년 민병대로 정식 전환되는데 이 조직은 준군사조직으로 공식적인 경찰과 별도로 공산당원들과 레지스탕스를 학살하고 탄압하는데 이용되었다.
이런 자료들을 보면 비시 정권의 '방패이론'은 설 땅이 없어진다. 이는 전쟁이 길어지면서 독일당국이 완전 점령국과 전혀 다름없는 요구를 프랑스에게 해 왔고 비시정권이 그 요구를 거의 전부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프랑스 국민이 비시 정부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비시 정부가 패전에 의해 불신임된 공화국을 대신한 정부라고 생각하였다. 프랑스인들은 히틀러를 현실적으로 잘 다루어 프랑스의 국가이익을 지키고 한편 이 수치스런 패배를 자초한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을 해 주었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드골장군의 자유프랑스는 영국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며 특히 소련의 스탈린과 프랑스 국내 공산당의 투쟁에 두려움을 가졌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1944년 10월 <프랑스여론조사소> 의 결과에 따르면 32%만이 페텡의 처벌을 지지하였고, 58%는 반대, 10%는 모르겠다는 응답이였다. 이 가운데 22%는 페텡의 정신적 무능을 이유로 용서받아야 하며 18%는 그의 나이를 고려해야하고 5%는 1940년과 점령기간 중의 그의 헌신을 고려해야 한다고 응답하였다. 한마디로 대체로 페텡에게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나 페텡의 공과에 대해 논란이 지속되는 중 알베르 까뮈는 사설에서 다음과 같은 독설을 퍼부었다.
‘페텡이 뭔가 재능이 있었다면 그것은 창녀와 같은 것이었다. 다시는 프랑스 사람들이 나이와 허황함의 트릭에 의해 유약해 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페텡에 대한 온정론은 모르네 검사의 다음과 같이 비판으로 전환기를 맞는다.
‘프랑스에서 15만 여명의 프랑스인 인질과 레지스탕스가 나치 독일군에 의해 총살되었고, 75만 여명의 노동자들이 나치 군수공장에 강제 동원되었으며 11만 여명의 프랑스인들이 저항운동 등 정치적 이유로 나치집단수용소에 유배되었고 12만 여명은 인종차별정책으로 나치집단수용소에 이송되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살아 돌아온 프랑스 사람은 전혀 없다.’
결국 재판부는 비시정권은 ‘불법이고 무효이며 나치독일에 협력한 범죄 집단’으로 규정한 후 페텡을 상대로 배심원 표결 결과 14 : 13 단 한 표 차이로 사형의 결론을 내렸고 모든 재산이 몰수되었다. 1944년 8월 15일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를 고려하여 사형의 집행의 정지를 재판부는 권고했다.
다음날 <루마니테>지는 사형선고가 집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사회당의 <르 포퓰레르>지는 프랑스가 베르덩의 영광을 몽뚜와르의 수치로 전화시켰기 때문에 그를 용서할 수 없으며 반역은 바로 그에 의해서 그와 함께 가능하였다고 언명하면서 사형을 지지했다. 그러나 드골은 8월 17일 곧바로 무기징역으로 감형하여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에 대해 배려했다.
1948년 5월의 한 여론조사는 1947년 석방지지율이 13%였던 것이 37%로 상승하였음을 보도했다. 페텡의 지지자들에 의해 창당된 느슨한 정치적 조직인 UNIR(Union des Independants Republiques)은 1951년 6월에 실시된 의회선거에서 무려 28만8천여 표를 얻었다.
그러나 페텡 원수는 감형되지 못하고 5년 8개월 간 감옥생활을 한 후 1951년 7월 23일 수감 중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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