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협력자 숙청의 핵심>
언론사의 경우도 예외가 없었다. 나치점령군과 비시정권의 지시와 규정에 순종한 언론사는 물론 나치독일의 프랑스 점령이후 창간된 모든 신문과 잡지들을 대상으로 소유주가 재판을 받는 경우 모두 발행 금지시켰다. 또한 소유주가 실형을 받으면 그 언론사는 곧바로 폐간되었다. 물론 문학과 스포츠 등 정치성이 전혀 없는 전문지는 이 조치에서 제외되었다.
신문사에 대한 재판은 1945년 말부터 시작되었는데 1948년 말까지 모두 538개 언론사들이 재판에 회부되어 이중 115개 사가 유죄선고를 받아 폐쇄됐고 64개 사가 전 재산 몰수, 51개 사는 일부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30개 언론사만이 무죄선고를 받았다. 전쟁 전부터 발행되던 유력 신문사 중 살아남은 것은 <르 피가로>, <라 크로와>, <르 탕> 등 3개뿐이었다. 이 신문들은 독일군의 점령과 함께 파리에서 지방으로 피난하였으며 점령기간 중에 정간함으로써 민족의 양심을 지켰다.
언론사 처리문제가 드골의 나치협력자 숙청의 핵심 요소였다는 것은 그의 『전쟁회고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알제리 시절부터 정부는 파리해방 때 언론문제를 최우선적으로 처리키로 결정했다. 1944년 5월 6일 훈령을 통해 적이 지배한 지역에서 발행한 신문들은 파리해방 후 발행할 수 없다. 신문사의 재산을 몰수하며 건물과 시설들은 지하의 저항신문들이 임대해 쓴다.’
출판사에 대한 숙청의 큰 골격도 마련됐다.
‘출판사 등의 민족배반 행위를 법적으로 밝혀내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멘트나 가죽을 적에게 팔아 단순히 돈을 버는 일보다 장‧단기적으로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유명한 <갈리마르 출판사>가 폐간 위기에 몰리기도 했고 수많은 출판사들이 문을 닫았다.
<가벼운 처벌의 연예계>
연예계에 대한 숙청도 빠지지 않았다. 먼저 예술직업인증명서 발부제도를 창안해 증명서 소지자에 한해 무대예술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는데 나치협력혐의가 조금만 있어도 증명서는 발급되지 않았다.
연예계는 다른 분야에 비해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그것은 프랑스 연예인들의 철저한 직업의식 즉 예술가적 기질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나치점령시절 프랑스의 자체영화산업은 거의 무너졌고 독일자본으로 설립된 <컨티넨탈필름>이 프랑스 영화산업을 장악했다. 그러나 나치독일의 선전영화가 프랑스인들에게 외면을 받자 나치도 프랑스의 예술성을 인정하면서 상당한 자율성을 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나치점령시대이기는 하지만 영화감독들은 점령당국의 간섭을 거의 받지 않고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나리오 검열도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이 당시 제작된 앙리 크루조 감독의 「까마귀」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화사상 가장 걸작 중에 하나로 뽑힌다. 이것은 <컨티넨탈 필름>이 프랑스에 있는 독일영화사이지만 작품을 만드는 프랑스 감독들이 독립적으로 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영화계의 숙청은 그야말로 미미하여 5명이 견책을 받았고 1명이 직업 활동 금지령을 받았을 정도이다.
프랑스 최고의 영화배우이며 샹송가수였던 모리스 슈발리에는 독일의 포로수용소에서 노래를 부른 사실로 조사 받았지만 무죄가 되었고 세계적인 여가수 에디트 피아프에게도 독일 공연을 문제 삼아 조사했지만 프랑스 포로의 수용소 탈출에 필요한 여권을 만드는데 협조한 것이 인정되어 역시 무죄 선언을 받았다. 오히려 재판부는 공식적으로 피아프에게 사죄까지 했다. 에디트 피아프가 만든 가짜여권은 무려 147개나 되었다.
드골은 초반부에 유명 언론인과 지식인들, 그리고 비시 정권의 최고지도부를 심판해 가혹할 정도로 엄벌을 내린 후 비시정권 공직자들, 지방공무원들, 사법부와 군부, 교육계와 경제계, 출판인과 연극인 및 영화계, 미술계, 석학집단인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나치협력자들을 차례로 숙청했다. 프랑스의 숙청 논리는 매우 간단했다.
‘나치전체주의에 ’민족의 혼과 정신‘을 팔아먹은 민족반역자는 프랑스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외국인이나 마찬가지다.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는 이념을 달리한다고 해도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역적’은 아니며 단지 국가의 관리와 경영을 달리하는 이념의 소유자라고 볼 수 있다.’
<프랑스를 팔아먹은 사람은 프랑스인이 아니다>
드골의 정책목표는 나치협력 민족반역자를 신속히 숙청해야만 프랑스의 위상도 올라가고 국내 질서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에 있어 가장 큰 특징은 언론인 등 지식인들을 제일 먼저 숙청하여 민심을 임시정부 측으로 돌려놓은 것이 가장 큰 성공의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드골은 조속한 시일 안에 프랑스를 새로운 틀로 개혁시키기 위해서는 다소 인기몰이식인 언론인을 비롯한 지도층만 척결해서는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드골은 부역죄(indignite nationale, 국민자격의 박탈)라는 특별법을 만들었다.
부역죄는 나치협력 반역혐의로 정식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으나 나치에 협력을 시도하거나 도움을 주려고 한 일반인 등 경미한 나치협력사범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즉 부역죄는 나치독일과 공개적으로 협력한 비시정권의 명령과 지시에 복종한 국민들, 국가반역죄로 다스릴 수 없는 비시 정권 지지자들, 나치점령기간 합법성을 가장한 비시정권의 법을 솔선해 준수한 자들을 다스리기 위한 법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나치독일에 협력한 프랑스 상층부는 물론 하층부 사람들도 모두 속아낸다는 뜻이다.
부역죄의 큰 골격은 국적박탈의 형벌이 자동적으로 병과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부역죄는 형을 선고받은 모든 나치협력자에게 병과되었고 심지어는 알제리에서 사형된 나치협력 반역자에게까지 소급해 적용됐다.
부역죄를 선고받은 부역자들은 선거권과 피선거권 및 공직 진출권이 박탈되며, 공무원, 군, 변호사, 회계사, 교원, 노동조합원, 언론인과 모든 통신과 정보업무에서 추방되고 심지어는 개인기업의 대표이사는 물론 이사로도 참여할 수 없도록 제한했다.
물론 이와 같은 부역죄는 이중처벌이라는 반대론이 고개를 들기도 했다.
특히 자동적으로 재산몰수형을 가하는 것은 너무 심한 형벌이라는 말도 있었으나 ‘국민의 단결을 해치고 프랑스인의 자유와 평등을 침해한 행위를 한 자가 바로 부역죄를 저지른 자’라고 공식적으로 규정하면서 여론을 유도하자 프랑스인들도 빠른 시간 안에 프랑스를 정화시키기 위해서는 필요한 법이라고 인식했다.
<보상받은 레지스탕스>
드골은 프랑스를 팔아먹은 사람은 프랑스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프랑스는 매국노가 아닌 프랑스인에 의해서 건설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치협력자 숙청이란 결국 프랑스 사회를 완전히 정화해줄 수 있는 방편이라는 뜻이다. 이점이 바로 프랑스가 해방된 후 다른 나라와 같이 좌파와 우파가 분리되어 극심한 혼란을 겪지 않고 국민 전체가 나치협력자 색출과 조국 건설에 앞장 설 수 있게 된 요인이라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반면에 프랑스점령기간 동안에 프랑스를 위해 싸운 레지스탕스들은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보상과 응답을 받았다. 사실상 레지스탕스운동을 벌인 프랑스인은 엄청난 숫자였다. 전쟁이 끝난 후 30만 명이 공식적으로 레지스탕스 경력자로 인정받았는데 이 숫자는 당시 성년 남자의 2퍼센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1944년으로부터 1947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주로 좌익으로 구성된 레지스탕스 세력은 정계의 다수를 이루었다. 상대적으로 전통적 우익을 포함하여 우익 정치세력은 비시정권의 몰락과 함께 거의 회복불능 상태로 되었다.
특히 비시정권에 손을 들어주었거나 직접 비시정권에 참여하였던 302명의 하원 및 상원의원들이 피선거권을 잃었다. 이 가운데 반이 넘는 163명이 1936년에 중도 또는 우익에 속하는 의원들이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또는 레지스탕스 신문들이 전체 일간신문 구독율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고 특히 공산주의계열의 신문 구독자수는 전전보다 네 배를 넘어섰다. 레지스탕스라는 이름은 일종의 성스러운 상징이 되어 ‘모든 문을 여는 열쇄'로 간주되었다.
2004년 파리는 ‘파리해방 60주년 축제’에서 레지스탕스 1,750명의 거리와 광장에 부치는 명명식을 거행했다. 북부 레지스탕스 리더 로제 발쟝의 이름은 파리 4구의 광장에 부쳐졌다. 파리 봉기를 주도한 지도자 탕기는 파리15구, 노조지도자 토레는 파리 10구, 드골임시정부 공산당각료 티용은 파리 19구, 드골의 동반자 샤방 델마스와 프라숑, 에슈타인 등의 이름도 포함되었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프랑스의 부역자 처리가 완벽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는 학자들도 있다. 부역자 처리과정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진행되어 무고한 희생자를 내기도 하였고 재빠른 종결로 미진하게 끝난 사건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우경화 현상이 초래되고 사면이 이루어 졌다고 하지만 그것은 국민적 화해의 대의명분 아래 이루어졌던 것으로서 부역자처단의 원칙 자체가 흔들린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부역자들에 대한 처단의 필연성과 그들의 죄악에 대한 비판의식은 일반 국민들 사이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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