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나치 부역자 청산

유럽의 나치 부역자 청산(9)

Que sais 2021. 7. 10. 21:33

클라우스 바르비 재판

미테랑 대통령의 사회당 정부는 1983년 레지스탕스 영웅 장 물렝을 고문 살해한 리용지역 나치 게슈타포의 바르비를 남미 볼리비아에서 체포해 재판했다. 벨기에와 네델란드 레지스탕스에 대한 잔혹한 탄압을 인정받아 194211월 프랑스로 차출되어 1942년부터 1944년까지 리용에 주둔한 SS특별부대를 지휘했다. 바르비가 볼리비아에 있다는 것을 파악한 프랑스 정부는 1972년 이후 10여 년 동안 계속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계속 여의치 않다가 볼리비아에서 좌파정권이 들어서면서 송환은 현실화되었다. 범죄로부터 40년만의 기소였다. 바르비에게는 프랑스에서 사형이 폐지되었으므로 무기징역형이 선고되었고 감옥에서 사망했다.

 

재판받는 독일인 바르비

 

폴 뚜비에르

폴 뚜비에르는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청산에 큰 소용돌이를 불러일으킨 사건이다. 1915년 전통적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프랑스 카톨릭 청년협회>에 가담하였고 징병되어 1940년 노르웨이로 파병되었고 휴전과 더불어 다시 비시정권의 선전 담당부에 가담했다. 19431월부터 민병대에서 사보이 지역, 론 지역의 민병대 정보 및 작전 책임자가 되었으며 종전 후 잠행했는데 학자들은 공산주의자들과의 싸움에 정보를 주는 대가로 경찰로부터 보호를 받았다고 추정한다.

그는 1946년 리용법정, 1947년 샹베리 법정에서 각각 궐석재판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카톨릭의 조직적이고 집요한 지원을 받았다. 그는 여러 수도원을 전전했는데 이들은 뚜비에르의 사면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죄상을 조사한 수사관은 그가 점령 중의 부역행위는 변명할 길이 없을 정도로 명확하며 1945년의 사형 선고는 일련의 범죄행위에 대한 정당한 처벌이라고 단정하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에 대한 죄상이 명백함에도 1971퐁피두 대통령은 그를 사면하여 고향마을에 공개적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이러한 대통령의 조치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레지스탕스 단체는 거의 전국에 걸쳐 격렬한 데모를 벌였고 19726월의 파리 시위에는 1,500명이 참석하였다.

<렉스프레스>지는 1972년 한 해 동안 약 2,000건의 기사를 게재하였고 1976년까지 다룬 기사건수는 5,000건을 넘었다. 그만큼 그에 대한 사면이 큰 반향을 받았는데 사면초가에 몰린 퐁피두 대통령은 자신이 사면한 것은 2차적 형벌에 불과한 것이고 공민권의 정지는 여전히 살아 있다고 변명하였다.

여하튼 그의 사면은 나치부역자 청산에 대한 재 검토를 요구하는 계기가 되었고 계속적인 고소 사건에 공소시효가 경과하였다는 하급심판결이 내려지기도 했으나 1976년 프랑스 대법원에 의해 번복되었다. 결국 그는 런던협약과 뉴른베르크 헌장에도 위배된다는 주장하에 결국 1989년 뚜비에르는 비인도적 범죄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의 재판은 그의 체포에 걸린 시간만큼이나 오랜 시간을 소요했고 1심에서 사형, 항소심에서 무죄, 다시 대법원의 파기등 엎치락 뒤치락하면서 결국 1992무기징역선고되었는다. 이때 그의 나이 79세의 고령이었고 감옥에서 사망했다.

 

모리스 파퐁 사건

1998, 비시정권의 보르도 경찰서장 모리스 파퐁이 나치협력자의 심판대에 올랐다. 그는 비시정권하에서 레지스탕스에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드골의 집권 후에도 현직에 그대로 머물렀으며 오히려 랑드 주지사로 승진까지 했다. 지스카르 데스텡 대통령 하에서는 예산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법정에 출두하는 프랑스의 '마지막 전범' 모리스 파퐁

그런데 40년이 지난 후 과거의 그의 행적이 보다 세밀하게 검토되면서 그가 숨겨온 비밀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독일의 요청에 의해 유태인을 추방하는 문서에 모리스 파퐁의 서명이 계속 발견된 것이다. 당시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 있던 유태인들을 사지에 몰아넣은 행위는 물론 시효가 배제되는 비인도적 범죄에 해당되었고 10년 징역형을 받았다. 그의 나이 90세로 교도소 3년 후 건강상 이유로 가석방된 후 사망했다.

 

르네 부스케 사건

1930르네 부스케20세의 나이로 홍수 속에서 수십 명의 사람을 구함으로써 전국전인 영웅이 되었다. 이런 유명세에 힘입어 그는 31세에 지방장관이 되었으며 1940년 비시정부의 경찰책임자가 되더니 1942년에는 친구이자 비시정부의 수상인 라발에 의하여 경찰총장으로 임명된다.

 

르네 부스케(우)

그가 유태인을 체포하는 데 보여준 그의 열정은 게쉬타포 책임자인 하인리히 히믈러 다음이라고 할 정도로 이름을 얻었다. 부스케가 20개월간의 집무기간 동안 4,000여 명의 어린이를 포함하여 독일에 넘긴 유태인의 숫자는 57,000명에 달한다. 그러나 그는 1949년 반역죄로 기소되었음에도 경미한 형 즉 5년의 공민권재한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그가 레지스탕스에 대한 조그만한 도움을 준 사실이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 내무 공무원으로 잠시 복직하여 근무하다가 은행가와 실업가로 성공적인 제2의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으나 1989년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는 비인도적 범죄행위로 고발당하였고 마침내 1991년에 기소되었다. 그러나 재판이 계속 지연되는 와중에 19936월 자신의 아파트에서 4발의 총탄을 맞고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결국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책임을 인정하고 공개사과했다.

학자들은 그의 사망으로 비시 관리와 독일 점령자 사이의 고차원의 부역관계를 드러내 줄 절호의 기회였는데 이런 기회가 사라졌다고 애통해 했다.

 

<이견이 있는 부역자 청산>

프랑스는 1964년부터 모든 학교에서 '레지스탕스와 추방'에 관한 가장 잘 된 글에 대하여 매년 상이 수여하는 등 이 문제에 대한 교육적 관심을 지속적으로 보이고 있다. 또한 레지스탕스는 영화와 소설, 역사 논문의 가장 보편적인 주제이지만 비시 정권과 나치 부역자는 거의 건드려 지지 않은 금기가 되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프랑스의 부역자 처리도 완벽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한국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숙정과정을 거쳤지만, 그럼에도 프랑스 내부에서는 1950년대 초의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사면 이후 과거사 청산의 미흡함에 대한 비판이 계속됐다. 이는 청산 과정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진행되어 무고한 희생자를 내기도 하였고 철저하지 못한 채로 끝나 버리거나 때로는 이들의 복귀가 쉽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사실 드골이 공정하게 처리했다고 하지만 부역자 처리는 결국 프랑스 국내의 내부적 분열과 갈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처럼 역설적인 것은 없다. 부역자의 손에 많은 프랑스인들이 죽음과 고통을 당하였고 상황이 역전되어 가해자로서의 부역자를 처단하는 일이야말로 보복적인 양상으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이들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19467월 수많은 프랑스 인들이 퐁텐블르 공원 숲속에서 민병대에 의해 살해당한 죠르제 만델에 바치는 기념비가 제막되었다. 그 돌의 표면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 194477, 프랑스의 적에 의해 살해된 죠르제 만델이 잠들다. 그러나 적은 이름이나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기서 적이란 비시정권하의 극우폭력조직이었던 민병대를 의미하는데 이들 역시 프랑스인이음은 물론이다. 사실 내부의 적에 의해 살해당한 애국자를 기리는 일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부역자 처벌의 아이러니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프랑스 과거사 청산은 1980년대 이후에도 ‘반인륜범죄’에 대한 단죄로 계속

그런데 프랑스에서 나치부역자에 대한 대대적인 사면이 이루어졌지만 그것은 국민적 화해의 대의명분 아래 이루어졌던 것으로 부역자 청산의 원칙 자체가 흔들린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프랑스인들의 부역자들에 대한 처단의 필연성과 그들의 죄악에 대한 비판의식이 프랑스인들 사이에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드골이 해방 전후에 즈음하여 부역자에 대한 처단과 청산작업을 제대로 진행기 때문에 그러한 대 명분의 흐름과 작업을 뒤바꾸어 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반 세기를 넘긴 뒤에 나치 부역 행위자를 재판정에 세우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르몽드> 기자가 한 중학생에게 위와 같이 질문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인간적으론 안 된 일이지만 역사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학생의 답변은 역사란 과거만이 아니라 오늘이기도 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프랑스는 나치독일에 협력한 배반자들을 외세와 내통한 이적죄간첩죄를 적용해 대담하고도 대단히 가혹하게 심판하고 처벌했다. 그리고 반 나치레지스탕스에 참여한 좌우파 정치인과 애국적 시민들로만 새로운 주체세력을 형성해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주적인 프랑스 국가를 건설했다.

드골은 프랑스를 새로 이끌 정부를 구성하면서 이념 문제에 크게 우려하지 않고 좌파든 우파든 레지스탕스에 참여한 세력을 총체적으로 통합함으로써 나치협력자들이 프랑스 내에서 근거를 갖지 못하도록 차단하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나치 부역자 청산에 대해 명쾌한 명제는 프랑스의 <작가 및 극작가 협회>가 회원들에게 답변을 요구한 다음과 같은 질문서로도 알 수 있다.

 

당신이 실제로 적의 선전에 봉사하지 않고 또한 당신의 글이나 연설, 행동이나 제스처를 통하여 적극적인 부역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수치스런 패배 뒤에 물리적이고 도덕적으로 고약한 점령기간 중에, 협력을 가장하여 우리나라를 타락시키고 우리 국민들을 굶기고 우리의 생각과 문화, 자유를 질식시키고, 우리의 동족을 고문하고 인질을 총살하고 우리의 천재들과 문명의 지독한 적에 대항하여, 사적으로 또는 공적으로, 당신은 우리 국민들이 준 신뢰에 기초한 프랑스의 지성으로서 당신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거나, 진실로 가슴속 깊이 우리가 지켜야 할 애국적 위엄에 부합하는 언동을 하였다고 느끼는가?’

 

참고문헌 :

반역자 처단이 프랑스를 단결시켰다, 주섭일, 한겨레21, 1999.08.26

레지스탕스 정신과 친일파 현상, beetle55, 검도여행, 2004.8.27.

과거사 청산프랑스를 봐라. 이인모, 주간동아, 2005.02.18

프랑스 해방 이후 나치협력자 대숙청, 주섭일, 내일신문, 2011.03.15.

나치 협력자 징벌 성사시킨프랑스의 험난한 청산 과정, 이영두, 법보신문, 2016. 02.23

[전시]과거사 청산, 프랑스는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 콜라보라시옹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

. 권종술, 민중의 소리, 2016.11.24.

프랑스 부역언론인 처벌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진민정, 한국기자협회, 2017.09.13

프랑스의 어메이징한 나치 청산. 박지현, 에펨코리아, 2021.01.03

나치 부역 95세 노인 추방한 미국, 79년 전 과거사 사과한 바이든일본은?, 김보겸, 이데일리, 2021.02.22.

Europe in the Twentieth century, Robert O. Paxton, Harcourt Brace Jovanovich Publishers, San Diego, 1975

https://blog.daum.net/poetlsh/6940451

http://www.prehistory.co.kr/split99/france.htm

http://blog.naver.com/hhong8942?Redirect=Log&logNo=120029228400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 주섭일, 사회와 연대, 2004.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이용우, 역사비평사,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