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나치 부역자 청산

유럽의 나치 부역자 청산(2)

Que sais 2021. 7. 10. 20:24

https://youtu.be/HFCjT8OL3fc

<망명정부 자유프랑스와의 알력>

독일의 프랑스 침략에 의해 비시 정권이 탄생했지만 합법성에 대해서는 당초에는 별다른 의문이 없었다. 프랑스 국민들은 비시정권이 비록 독일에 사실상 항복한 후 등장한 정부이지만 그 자체가 무효인 정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형식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비시정권은 당시의 3공화국 헌법에 따라 구성된 합법적인 정권이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항복보다는 독일과 비시 정권의 휴전협정의 결과가 보다 프랑스에 이익을 안겨준다는 것은 큰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적국으로 규정된 독일의 점령의 목적에도 부합된다는 구조적 모순을 갖고 있었다. 1351년의 영국 에드워드3반역행위를 적에 대한 부역의 형태로 규정했다.

 

페텡과 히틀러

그런데 이를 적용하면 프랑스의 비시 정권도 부역의 정의에 포함된다. 바로 나치에 협력한 비시정권의 페텡 원수가 19401024일 나치 총통 아돌프 히틀러와의 회담을 마친 후 같은 날 프랑스 라디오를 통하여 나치독일과 프랑스사이의 협력관계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드골의 망명정부 자유프랑스 선언

이 당시 상당수 많은 프랑스인에 의해 이는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망명정부 자유프랑스>를 창설한 드 골 장군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194065일 국방차관에 임명된 드골 소장은 영국으로 긴급 도피한 후 BBC 방송을 통해 페텡의 휴전요구에 반대하고 끝까지 저항하자는 방송을 내보냈다. 이어서 <망명정부 자유프랑스>가 해외에서 나치독일과 전면전을 치르겠다고 프랑스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드골의 선언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페텡 정부는 나치독일과 휴전협정을 목표로 삼아 수립되었기 때문에 정통성을 상실했다. 프랑스대혁명 때의 헌법(1793)에 의하면 프랑스 국민은 프랑스 영토를 점령한 적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없다.

 

페텡 정부는 휴전에 동의하여 무조건 항복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국민을 나치독일의 노예상태로 전락시켰으므로 불법적인 정부이다. 페텡 정부가 휴전협정에 서명한 것은 민족이익을 배반한 것이므로 <망명정부 자유프랑스>만이 정권의 정통성과 합법성을 획득했다.

 

페텡 정부가 나치독일과 맺은 휴전협정도 무효이다. 협정 제10에 프랑스 국민에게 나치독일에 반대하여 무기를 들고 투쟁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드골은 휴전협정의 무효화 논리를 근거로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했으며 점령지역 내 저항운동을 조직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여하튼 영국에서 드골은 <망명정부 자유프랑스>를 이끌면서 프랑스 국내의 반 나치저항운동을 지휘하고 연합군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나치독일과 싸웠다. 그러므로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으로 불리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19446월 프랑스가 해방되기 시작할 때까지 4년 간 프랑스에는 두 개의 정부가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비시정권의 부역>

절름발이 신세의 비시 정권이 여러 모로 난관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토는 분할되고 독일군의 물자와 인력 징용, 점령경비의 부담이 가중되는데다 경제활동조차도 독일군에 의해 지배되었다. 중요한 북아프리카의 식민지와 프랑스의 관계는 사실상 단절되었다.

그러나 독일이 북아프리카에서의 군사기지를 요구하였으나 페텡은 휴전협정을 들어 거부하였다. 특히 페텡은 1024히틀러와 몬토와르(Montoire)에서 회담을 가졌을 때 히틀러가 영국과의 전쟁에 공동으로 참여하자고 권유 아닌 권유를 했는데도 페텡은 이를 물리쳤다. 그러면서도 페텡은 회담이 끝난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대독협력의 길에 발을 담그는 것은 명예로운 것이고 또한 유럽의 신질서를 건설하는 활동이며 프랑스의 통일성, 10세기에 걸친 그 통일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주변 정황은 어떻든 그동안 애매한 독일과의 관계가 이제 한층 더 분명하게 부역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히틀러와의 회담과 그 결과에 대해 영국과 미국은 '프랑스의 노예화의 새로운 단계'라고 비난하였다. 휴전협정으로부터 겨우 3개월이 채 되지 않아서였는데 사실 부역은 항복한 프랑스에게 있어서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라 볼 수 있다.

파시스트들의 요청과 레지스탕스의 증대는 비시정부로 하여금 선택의 기로에서 독일의 편으로 기울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페텡은 대독협력에 우유부단하다는 파시스트로부터의 공격과 독일로부터의 압력을 받고 일부 파시스트 지도자들을 비시정권의 행정부 안에 임명했다.

독일은 이보다 더한 조처를 취했다. 19421111일 프랑스의 자유지역을 독일군이 침략했는데 이는 휴전협정의 명백한 위반이었지만 페텡으로서 저항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주권독립국으로서의 비시정부는 허울만 남은 셈이다.

 

<드골 장군의 나치부역자 척결>

드골은 1944825폰 콜티츠 독일군사령관이 항복하면서 수도 파리가 해방되자 개선장군으로 입성했다. 그러나 프랑스 전국이 완전히 탈환된 것이 아니므로 제헌의회를 구성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드골은 임시정부의 대통령 자격으로 독일과 전쟁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해방된 지역에서는 나치협력자들을 철저하게 정리하겠다고 발표했다. 한마디로 이들은 반역 부역자라는 뜻이다.

 

드골의 파리 입성

그러므로 독일군에 대한 드골의 <자유프랑스>레지스탕스 운동은 곧바로 비시 정부와 정권을 뒷받침하고 있던 부역자들과의 전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런 첨예한 논쟁은 내전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드골의 서슬퍼런 나치협력자들에 대한 숙청은 곧바로 원리적인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페텡의 독일과의 협력이 과연 프랑스를 독일의 직접적인 점령과 수탈로부터 방어한 차선책이었던가 아니면 프랑스의 불이익과 그 국민의 고통을 초래한 이적행위인가이다. 물론 이 문제는 프랑스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나치 점령국 네덜란드, 벨기에, 노르웨이 등에서도 벌어졌다.

드골의 나치협력자 숙청은 이때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다. 학자들은 194211월부터 이미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은 시작되었다고 인정한다. 당시 연합군은 유럽 본토를 공격하기 전에 아프리카를 먼저 점령할 계획을 수립했고 영국과 미국의 연합군이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지역에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전세를 뒤집었다.

194363드골은 알제리에서 자신이 주도하던 <망명정부 자유프랑스>를 주체로 파리가 해방된 후 프랑스임시정부의 모태가 되는 <민족해방프랑스위원회>를 공식적으로 출범시켰다. 드골은 이어서 1943810일 나치에 협력한 프랑스의 반역자, 나치협력자들의 숙청방침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국가가 애국적 국민에게는 상을 주고 민족배반자나 범죄자에게는 벌을 주어야만 비로소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 있다.’

 

이 당시 드골이 규정한 민족반역 범죄자는 자유박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프랑스의 패배를 악용한 투항주의자, 프랑스 국민을 악의 길로 인도한 비시정권의 고위공직자들과 추종자, 그리고 나치독일의 승리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협력한 프랑스인들이다.

특히 나라를 팔아먹은 민족반역자에 대한 숙청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므로 숙청이 가능한 지역부터 곧바로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곧이어 나치협력자 체포바람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불기 시작했다.

드골은 비시정권의 각료를 지낸 벨주레 장군을 체포했다. 알제리 태생 사업가로 비시정권의 내무장관에 임명된 피에르 퓌쉬도 체포하여 <프랑스전국해방위원회(French Committee of National Liberation)>의 명으로 재판에 회부했다. 퓌쉬는 자신은 정치적 속죄양이라고 변호하면서 모든 자신의 행동이 전임자의 계획을 그대로 집행했을 뿐이라고 항변했지만 사형이 선고됐고 1944320일 총살당하였다.

또 다른 비시 정부의 각료였던 쟌 베르제레 역시 <자유 프랑스>에 의해 체포되어 적과의 부역, 반역, 국가안전의 위해혐의로 처형되었다. 한 때 비시정부 각료를 지내다가 라발 총리의 복귀에 반대하여 사임한 마르셀 페이루통<숙청위원회>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고 역시 비시의 각료였던 플란뎅, 부와송 장군도 체포되었다.

드골이 이와 같이 비시정권의 전직 고위공직자들을 체포하자 독일과 전면적인 전쟁을 벌이고 있는 영국과 미국은 곧바로 반발했다. 처칠은 북아프리카 전쟁이 급선무이므로 연합국에 어느 정도 협조하고 있는 비시 정권의 이탈을 원하지 않았다.

 

루즈벨트, 드골, 처칠

영국은 드골에 의해 체포된 프랑스 비시정권의 고위공직자들의 망명을 주선하겠다고 밝혔고 루즈벨트 대통령아이젠하워 장군에게 드골이 체포한 사람들에게 어떠한 위해도 가해지지 않도록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체포된 사람들의 재판이 설사 필요하더라도 프랑스가 나치로부터 해방되고 새 헌법에 의한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는 재판을 시작하면 안 된다고 못 박았다. 더불어 이들은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 드골 장군의 제거를 꾀했다.

물론 드골은 연합국의 반발이 예상외로 커지자 루즈벨트의 요구에 일단 순종함으로써 재빨리 불씨를 잠재웠다. 그리고 일부 공직자들을 석방하는 제스처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