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중국의 김치공정

길 잃은 중국의 김치공정(1)

Que sais 2021. 7. 11. 09:46

한국인이라면 적어도 김치, 고추장, 된장찌개 먹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김치를 우리나라의 대표 음식으로 꼽는 데 주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에 출전한 선수에게 김치 공수가 시작되며, 우주인 이소연을 위해 특별우주김치를 만들어 공급하기도 했다. 한국이 비약적인 경제 발전 등으로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자 김치에 대한 시각도 달라져 그야말로 놀라운 구호들이 등장한다.

 

일본과 중국을 점령한 김치의 맛

세계에 진출하는 김치

기무치가 아닌 김치

김치의 우수성 세계에 알리기

 

김치의 위상이 달라 외국인들이 김치에 매력되어 김치를 맛있게 먹는 것이 마치 한국의 위대함을 전파하는 메신저로 설명되기도 한다. 다른 말로 말한다면 김치가 우리의 가장 뛰어난 전통 음식으로 민족의 우수성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식음식이라는 뜻이다.

 

대한민국 전통음식 김치

그런데 갑자기 김치 논쟁이 한국과 중국 사이에 일어났다. 세계는 남이 잘 되는 것을 눈뜨고 보지 않으려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는 한국과 중국의 김치 공정으로도 알 수 있다. 공정이라 하면 그동안 한국과 중국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동북공정을 뜻하므로 김치공정이라는 말의 의미를 곧바로 이해할 것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20201129ISO(국제표준화기구)는 중국의 파오차이(泡菜)'국제 표준'으로 삼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중국의 공용 언론기관인 <환구시보>중국 김치가 국제 김치 시장의 기준이 되었다고 엉뚱한 주장을 했다. 한마디로 김치가 파오차이에 포함되므로 김치의 종주국은 중국이라는 뜻이다.

 

 

더불어 중국 전통문화를 소개하는 유튜버 리즈치가 배추를 수확해 김치를 담그는 영상을 올린 것이 김치공정을 촉발시켰다. 리즈치 유튜버의 구독자는 1,400만 명에 달하는데 자신의 채널에서 라이프 시리즈 마지막 에피소드 : 무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김치에 관한 영상을 올렸다. 영상에 좋아요를 누른 사람도 단 하루에 12만 명에 달할 정도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리즈치는 영상 속에서 직접 배추를 수확한 뒤 소금에 절이고 고춧가루 양념에 버무려 김치를 만드는 모습을 담았다. 우리의 김장과 완전히 일치한다. 리즈치는 장독 안에 보관하고 있던 김치를 꺼내 김치찌개로 보이는 국물 요리를 완성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리즈치의 김치만들기

그런데 리즈치가 영상을 본 한국인들은 영상에 남긴 ‘Chinese Cuisine(중국 요리법)’, ‘Chinese Food(중국 음식)’ 등의 해시태그가 적혀있는데 이는 김치를 중국 음식으로 오도했다고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우려는 틀리지 않아 실제로 각국 네티즌들은 영상 댓글에 김치에 관한 영상 중 가장 아름답다’, ‘이 음식을 만들어보고 싶다’, ‘중국 문화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며 많은 관심을 보였다. 한국 네티즌을 포함한 소수의 한국인만이 영상 속 등장하는 음식은 김치이고, 한국의 전통 음식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중국의 주장은 워낙 큰 파장을 일으켰으므로 김치의 종주국으로 알려진 한국에서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한국 김치와 중국 파오차이는 제조공정 및 발효 단계에 있어 큰 차이점이 있으므로 파오차이와 김치는 아예 비교조차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한국의 김치에 대해 구설수를 만드는 것은 그만큼 한국의 김치에 중요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치가 큰 논쟁 즉 중국의 김치 공정에까지 등장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으로 보아 김치에 관한 한 남다른 콤플렉스가 있다는 뜻으로도 설명된다. 중국의 김치 공정에 들어가기 전에 한국의 김치에 대해 먼저 설명한다.

 

<악명 높은 김치>

김치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데는 역설적으로 악명 높은 냄새가 큰 기여했다.

외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한국인들에겐 김치에 얽힌 에피소드를 한둘 정도는 갖고 있을 것이다. 김치 냄새 때문에 아파트에서 쫓겨난 것은 기본이고 경찰서에 불려가기까지 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만큼 김치 냄새는 외국인들에게는 참기 힘든 냄새로 알려진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을 깔볼 때 쓰는 말은 김치 냄새나는이라는 단어였다. 야만인의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김치가 현재 세계적인 식품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은 물론 김치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던 일본인들조차 김치 냄새에 관대해 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김치 냄새가 무엇이냐다. 김치가 시어지면서 해로운 균이 번식하고 영양분도 떨어진다. 김치가 익고 난 뒤 젖산균도 스스로 생산한 유기산에 견디지 못해 사멸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김치 속의 효모나 곰팡이가 다시 자라기 시작해 김치의 맛이 변한다. 이때 김치에서 군내가 나고 갈색으로 변하게 된다. 또한 김치 발효는 기본적으로 혐기성 발효이므로 김치 용기의 뚜껑을 자주 열면 정상적인 맛이 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김치가 과도하게 발효되면 신맛이 강하고, 조직이 연화된다. 가장 맛이 좋을 때의 김치는 pH4.04.5로 알려져 있으며, 김치에 있는 미생물은 계속적으로 발효해 pH가 떨어지므로 알맞게 익은 김치는 냉장고에 보관해 저장하는 것이 좋다. 여러 가지 연구의 결과를 보면 익은 김치를 25도에 보관하면 그 품질을 약 1개월간 보존할 수 있다.

이런 모든 과정에 있는 김치는 발효, 즉 썩는 과정을 거친 것이므로 냄새로만 따지면 좋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외국인이건 한국인이건 사람이 냄새에 대해 느끼는 것은 대체로 일치한다. 그런데 외국인들은 대부분 김치 냄새를 싫어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유의 식생활 때문에 이를 의식적으로 좋은 냄새로 분류하여 구수하다고 표현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외국인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음식이라 하여 무조건 그들의 취향에 맞추어야 할 필요는 없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후로마즈(치즈)도 발효 식품이라 냄새가 대단한데 그 중에서도 푸른곰팡이 즉 페니실린의 원료라고 알려지는 치즈류는 김치 냄새로 무장된 한국인에게도 보통 고역이 아니다.

한국에서 진한 냄새가 나는 김치가 태어난 것은 우리나라의 특수한 기후와 관련이 있다. 세계적으로 보아 저장 음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발효식품이고 다른 하나는 건조식품이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는 일찍이 농업사회로 정착했다. 반면 목축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물과 풀을 찾아 부지런히 옮겨 다녀야 했다. 이들 생활 방식이 음식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음은 자명한 일이다.

농경민족은 물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으므로 벼 생산이 가능하고, 음식도 물을 이용한 국과 찌개가 발달한다. 그러나 목축지대에서는 먹을거리를 둘러싸고 전쟁과 약탈이 끊이지 않았고 자연적으로 고기를 주식으로 했으며 이로 인해 전투적인 성격이 강했다. 또한 물을 아껴야 하는 풍토상 빵이나 훈제 식품이 발달했다. 이러한 음식 문화 차이를 문명의 잣대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프랑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 박사는 음식을 구워 먹는 요리법보다 발효시켜 먹는 요리법이 훨씬 진보한 문명을 나타낸다고 말했다. 발효 식품은 불에 단순히 굽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배추 재배

여하튼 우리 민족은 쌀 위주의 식생활에 채소를 즐겨 먹었다. 그러나 삼한사온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기후는 계절 변화가 뚜렷하여 겨울에는 채소들이 생산되지 않고 저장 또한 어려웠다. 따라서 건조 처리나 소금 절임에 남다른 슬기를 동원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바로 김치가 등장하게 된 이유다.

채소를 장기간 저장하는 방법은 건조시키거나 절이는 것이다. 그러나 건조시킨 채소를 조리했을 때 채소의 원래 맛을 잃고 영양소가 손실된다. 또한 소금에 절이면 채소가 연해지고 오래 저장할 수 있다. 소금의 삼투압 작용으로 채소의 수분을 빼앗아 미생물이 자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금 절임 역시 맛이 문제다. 이때 채소와 어패류를 묽은 농도의 소금에 절이면 자가효소(自家酵素) 작용과 호염성세균(好鹽性細菌)의 발효작용으로 인해 아미노산과 젖산을 생산하는 숙성 현상이 일어나고 맛이 좋은 발효 식품을 만들 수 있다. 이런 원리로 태어난 것이 김치와 젓갈이다.

 

<김치의 역사>

한국에서 언제 김치를 먹었느냐에 대한 똑 부러지게 적힌 기록은 없지만 과거부터 김치를 먹었음은 틀림없다. 그것은 시경의 다음과 같은 글로도 유추할 수 있다.

 

밭 속에 작은 원두막이 있고 외가 열려 있다. 이것으로 저()를 담가 조상께 바치면 천수를 누리고 하늘의 복을 받는다.’

 

가 바로 김치인데 여기에서 김치는 제사음식의 의미를 갖고 있다. 함부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라는 뜻이다.

진나라 때 여불위가 편찬한 여씨춘추에도 공자가 처음에 콧등을 찌푸려가면서 저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주나라 문왕이 창포저를 매우 좋아했다. 그 말을 들은 공자는 얼굴을 찌푸려가며 (창포저를) 먹었는데 3년이 지난 후에야 익숙해졌다.’

 

공자는 자신의 아이콘인 문왕의 일거수일투족을 좇았는데 문왕이 창포저를 좋아했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창포저를 준비했다. 창포저는 말 그대로 창포라는 식물을 절인 김치()를 가리킨다. 이 김치를 한국인들이 김치라면 연상하는 빨간 고추와 젓갈에 버무린 요즘의 배추김치를 연상하면 안 된다.

글로만 보면 공자는 처음에는 신맛이 강한 창포김치에 미간을 찌푸릴 정도로 적응하지 못했음에 틀림없는데 그래도 아이콘 문왕을 따라 3년을 계속 김치를 먹었더니 겨우 적응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김치 먹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한나라 때의 주례에도 순무, 순채, 아욱, 미나리, 죽순 등 일곱 가지 를 만들고 관리하는 관청에 관한 기록이 있다.

 

중국에서 김치류인 를 오래전부터 먹었다고 해서 한국에서도 를 먹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대에 중국을 포함하여 극동아시아를 아우르는 음식문화가 존재했다고 생각하면 현재의 한국인들도 유사한 발효식품 즉 를 즐겼다고 유추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기원을 둔 절임채소는 한반도의 김치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

중국인들은 강한 신맛을 내는 초산의 발효에 기초한 채소절임을 좋아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전통적으로 젖산발효를 지향하는 방법을 선호했다.

초산은 알코올을 분해하는 초산균에 의해 만들어진다. 젖산에 비해 강한 신맛을 지닌다. 국물로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젖산은 당분을 분해하는 젖산균에 의해 만들어진다. 분해산물로 은은하고 달콤한 신맛에 가깝기 때문에 짠맛을 적게 하면 국물까지도 음용이 가능하다.

이 말을 풀어서 설명한다면 중국의 초산발효 식품은 조미료의 역할에 머물렀다. 강한 신맛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의 젖산발효 저체류, 즉 김치는 밥과 더불어 먹을 수 있는 반찬의 몫까지 수행했다. 이런 다목적 효용도가 있으므로 염도를 낮추고, 보존성을 높이는 고추와 같은 향신재료를 적극적으로 유입시킨다. 우리만의 김치문화가 확립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한국인이 삼국시대에 김치를 먹었다는 명백한 기록도 등장한다. 중국의 정사인 진수(陳壽, 233~297)삼국지<위지동이전> ‘고구려조에 자의선장양(自意善藏釀)이란 글이 보인다.

학자들은 이 글이야말로 술빚기장담기젓갈과 같은 발효식품 기술의 총칭으로 채소발효도 함께 포함된다고 인식한다. 이 글에서 채소 발효식품을 먹었다는 것은 김치를 먹었다는 것과 다름없는데 진수의 삼국지편찬 년대를 감안하면 적어도 삼국시대 초기에도 김치류를 먹었다는 뜻이다. 삼국시대에 재배되고 있던 채소로는 순무가지상추토란 등이 있으며, 그 외에 생강아욱부추겨자(배추 종류) 등이 생산되었다. 이외에 죽순고비고사리도라지더덕과 같은 많은 종류의 산나물과 들나물 등을 채집하여 식용했다. 그러므로 삼국시대 사람들이 재배채소채집채소 중 염장에 견딜 만한 것을 짠지류와 같은 채소 소금절임으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물론 보다 후대인 삼국사기에 김치를 유추할 수 있는 글도 있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제8> ‘신문왕 3(683)’에 왕비를 맞는 기록이 있다.

 

일길찬 김흠운(金欽運)의 작은 딸을 맞아 부인을 삼기로 하고 먼저 이찬 문영(文潁)과 파진찬(4등관명) 삼광(三光)으로 하여금 납채(納采)를 보냈는데 폐백(幣帛)15차이고 미주(米酒)유밀(油蜜)장시(醬豉)포해()135차이고 조곡(組穀)150차였다.’

 

여기에서 장시는 간장과 된장을 의미하고, 해는 어해(), 저해() 등의 뜻이 있어 젓갈김치의 총칭으로 해석한다. 채소 발효식품인 김치가 쌀어패류 등과 함께 상용 기본 식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삼국시대에서 김치를 먹었음을 확인해주는 유물도 발견되어 학자들을 고무케 했다. 600년경에 창건된 전라북도 익산의 미륵사지에서 100cm 이상 되는 대형 토기들을 땅에 묻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이들 대형 토기들의 배치나 파묻힌 형태가 겨우살이에 대비하여 김장독과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속리산 법주사 경내에는 돌로 만든 독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신라 33대 성덕왕 19(720)에 설치된 김칫독으로 계속 사용되어 왔다. 김칫독을 찾기 위해 법주사를 여러 번 방문하여 경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김칫독에 대해 질문했지만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어 번번이 실패했다.

 

법주사 김칫독(만성스님)

20105월 법주사의 만성 스님이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거대한 김칫독이 일반인들은 물론 경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조차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법주사의 선원(禪院) 안에 있고 현재 사용하지 않고 있는데다 팻말조차 없기 때문에 김칫독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한다. 만성 스님의 안내로 선원을 방문할 기회를 받아 전설처럼 알려진 김칫독을 볼 수 있었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법주사는 고려 숙종(12세기) 당시 30,000여 명의 승려들이 기거할 정도로 거대한 사찰이므로 김칫독도 그에 걸맞을 정도로 거대해야 했을 것이라고 만성 스님이 설명했다. 이들 자료와 법주사의 김칫독 등 실물을 볼 때 단편적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고대부터 겨울에 대비해서 갖가지 저장기술이 발달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참고적으로 근래 김칫독 앞에 안내판이 설치되어 수월하게 김칫독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