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김치 등장>
세계인들을 매료시키는 현재의 김치 특징은 젓갈과 고춧가루가 풍성하게 들어가 있는 배추김치를 뜻한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김치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빨간 고추와 배추를 연상하는데 놀랍게도 고추와 배추는 그다지 오래된 식품이 아니다. 고추에 대해 먼저 설명한다.
우선 김치에 고추가 들어가게 된 것은 근래의 일이다. 이는 고추는 신대륙의 산물로 기본적으로 1600년대 초에 전래된 식품이기 때문이다.
16세기에 중국에서 발간된 『본초강목』에는 고추에 관한 언급은 없고, 다만 일본의 『초목육부경종법』에 1542년 포르투갈 사람이 고추를 전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국에서는 이보다 약간 늦은 1614년 이수광이 작성한 『지봉유설』에 고추를 ‘남만후추’라고 쓰고 있다.
‘남만후추는 큰 독(毒)을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왜국(倭國)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왜개자’라고 했다. 지금은 이것을 심는 일이 종종 있는데 술집에서는 그것의 매운 맛을 이용한다.‘
이와 같은 기록을 볼 때 고추가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으로 추측되지만 최홍식 박사는 고추가 명나라를 통해서 우리나라에 전해졌을지도 모른다고 추정했다. 일본 사람들이 고추를 ‘고려후추’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고 우리나라에서 고추를 ‘당초(唐椒)’라고 불렀다는 것을 볼 때 고추가 일본이 아닌 중국에서 직접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이다.
물론 고추가 조선 초기에도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임진왜란 105년 전 의서에 한글로 ‘고쵸’라는 기록이 발견되었다는 설명이다. 이는 고추가 임진왜란(1592~1598년) 때 일본을 통해 들어왔다는 통설과는 달리 훨씬 이전인 조선 초기에도 한반도에 있었다는 주장이다. 한국식품연구원 권대영 박사와 한국학중앙연구원 정경란 박사는 고추의 일본 전래설을 고문헌 분석을 통해 부인했다.
고추의 ‘일본 전래설’은 이성우 박사의 『고려이전의 한국식생활사 연구』(1978년 출간)에서 소개된 이후 통설로 받아들여져 왔고, 임진왜란 이전에 김치는 고추가 들어가지 않은 백김치밖에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세종 15년(1433년)의 문헌인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세조 6년(1460년)에 발간된 『식료찬요(食療纂要)』에 고추장을 뜻하는 ‘초장(椒醬)’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물론 초(椒)가 현대의 고추를 뜻하는 것인지가 핵심인데, 이를 입증하는 기록이 고문헌에 다수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발발 100여 년 전인 성종 18년(1487년)에 발간된 『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에는 ‘몸이 안 좋을 때 고쵸를 고아 먹으라’라는 설명이 있는데 이곳에서 한자 초(椒)를 한글로 ‘고쵸’라고 적었다. 중종 22년(1527년)의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도 ‘고쵸 초(椒)’가 명시돼 있다. ‘순창초장(淳昌椒醬)이 전국에 유명하다’는 표현이 이미 1670년대 이후 문헌에서 나오므로 ‘초장=고추장’이라는 데 이의가 없다고 연구팀은 주장했다. 특히 권 박사는 콜럼버스가 전달했다는 아히(aji)라는 고추는 우리나라 고유 고추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생물학적ㆍ농경사학적 이유를 들어 설명했다. 그는 고추와 고추장이 중앙아메리카가 아닌 중국에 오래전부터 존재했다는 근거로 중국 고문헌의 기록을 제시했다. 중국 당나라 선종(850년) 때 발간된 『식의심감(食醫心鑑)』은 닭 관련 음식을 설명하며 ‘초장(椒醬)’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으며 일본 문헌에는 고추가 한국에서 전래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는 앞으로 많은 연구에 의해 명쾌한 결론이 날 것으로 생각한다.
고추가 우리나라에 도입되자마자 김치에 사용된 것은 아니다.
실제로 김치에 고추가 사용되었다는 기록은 고추가 도입된 지 백여 년이 지난 1715년경의 『산림경제』에서 처음 보인다. 1600년대 말엽까지만 해도 고추를 쓰지 않고 무, 배추, 고사리, 청대콩 등으로 담근 김치와 소금에 절인 무뿌리를 묽은 소금물에 담근 동치미 등이 식단에 올랐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고추가 김치에 사용된 기록이 나온 지 50년 후인 1766년경에 발간된 『증보산림경제』에는 무려 41종의 김치무리가 다양한 형태로 수록되어 있으며, 1800년대에 김치 담금법에는 고추를 썰어 다른 양념과 함께 켜켜이 넣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827년에 발간된 『임원십육지』에도 많은 종류의 김치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특이한 것은 고추 사용을 적극 권장했다는 것이다.
고추가 한민족의 주류로 자리잡게 된 것은 간단하다.
한국인의 장점은 세계적으로 매운맛에 적응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는 김치로 보아도 알 수 있다. 한국인들이 평소 먹는 김치를 외국인들은 학을 뗀다. 너무 맵다는 것이다.
고추가 매운맛을 내는 것은 캅사이신이라는 성분 때문인데 캅사이신은 기름의 산패를 막아주고 젖산균의 발육을 도우며 비린내가 나는 것을 막아준다. 캅사이신의 함유량은 산지에 따라 다른데 보통 0.01∼0.02%로서 외국산이 국내산보다 2∼3배 많다. 외국을 여행할 때 외국의 고추가 매우 맵게 느껴지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고추에 많이 함유되어 있는 비타민 E는 비타민 C의 산화를 막아주는 작용을 한다. 고추에는 특히 비타민 C가 많은데, 같은 양의 감귤류에 비해서는 2배, 사과에 비해서는 50배나 많다. 특히 국산 고추는 아미노산과 당분의 함량이 많아 감칠맛과 단맛이 있으며 카로틴 함량이 높기 때문에 비타민 A가 많은 것도 장점이다.
한국인들에게 멕시코의 고추로 만드는 ‘타바스코’는 그야말로 악몽과 같다. 그만큼 맵다는 뜻인데 멕시코인들은 멕시코 고추를 날로 먹어 많은 외국인들을 놀라게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많은 멕시코인들이 한국의 김치를 먹고 너무 맵다고 어쩔줄을 몰라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민족마다 입 즉 혀에서 느끼는 감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하튼 한민족은 매운 맛에 익숙한데 과거 한국인의 선조들은 이를 후추로 해결했다. 문제는 후추는 중국으로부터 수입해야하므로 서민들 음식에까지 사용하기에는 너무 귀한 재료였다. 대체용 재료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고추라는 뜻이다.
한국의 김치가 특별히 발전한 것은 지역적 기후와 연관이 있다.
이는 남쪽에서 담그는 김치는 지금도 소금 간이 북쪽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한반도 남쪽에서 기후가 북쪽보다는 따뜻하다. 그러므로 음식물들이 곧바로 쉬고 보존이 어려우므로 재료를 훨씬 짜게 절인다. 그런데 소금만으로 김치를 짜게 한다면 거의 쓴맛 한마디로 먹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 단점을 메우기 위해서 18세기 후반부터는 김치에 젓갈을 넣었다는 것이다.
젓갈을 넣은 김치는 아미노산 때문에 맛이 훨씬 좋아지지만 비릿한 맛도 난다. 물론 젓갈만이 아미노산 맛을 내는 것이 아니므로 간장으로도 김치를 담글 수 있지만 항상 먹는 김치를 간장으로 담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산초나 초피의 매운맛을 사용했는데 고추가 들어오자 폭발적으로 고춧가루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김장김치 등장>
고추가 비교적 늦게 조선에 도입되었지만 현대 김치의 대명사인 김장김치 즉 포기김치는 이보다도 매우 늦게 등장했다는 점이다. 즉 현대 세계인들이 식용하는 통배추 김치가 생긴 것은 배추가 개량된 근대에 이르러서이며 그 이전에는 배추김치가 없었다는 뜻이다.
한국인들이 놀라는 것은 현재 세계를 석권하고 있는 김장김치가 한국에 도입된 것은 100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19세기 초에도 반결구종 배추 재배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김치는 배추를 기본으로 하는데 배추는 본래 서양 채소였다. 지중해 지역에서 중앙아시아 지역을 거쳐서 중국에 전파된 것이 우리나라까지 들어온 것이다. 우리가 즐겨 먹는 양배추, 브로콜리, 콜리플라워 등도 지중해 지역에서 분화돼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배추와 관련된 문헌 기록들은 기원전 10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 주ㆍ한ㆍ진 시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나라 시대 『남방초목상』의 기록이 처음이고 『제민요술』에는 배추 심는 법이 무와 같다고 적혀 있다. 즉 7세기경 중국 북부지방의 ‘순무’와 중국 남부의 ‘숭(菘)’이 중국 북부 양주에서 자연 교잡돼 나타난 배추가 시조라는 것이다. 이후 16세기 반결구 배추, 18세기 결구 배추가 등장하면서 결구성을 지닌 배추의 시조는 중국으로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배추 도입은 매우 늦는데 고려의 이규보가 적은 『동국이상국집』에 등장하는 여섯 가지의 채소(외, 가지, 순무, 파, 아욱, 박)에도 배추는 없다. 1670년경의 장씨 부인이 한글로 요리명과 요리법을 쓴『음식디미방』에도 배추김치에 대한 내용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17세기 말까지 경상도 북부지방에 고추가 보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음식디미방』에는 산갓김치, 생치침채, 생치잔지히, 생치지히 등 김치류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들 음식에는 천초, 후추, 마늘, 파 등을 양념에 주로 사용했다.
물론 이보다 앞선 13세기경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의약서인 『향약구급방』에 처음으로 원시형 배추를 뜻하는 송(菘)이란 표현이 나타난다. 이 책은 치료를 위한 처방전들을 엮은 것으로, 고려 시대는 배추가 식용이 아닌 약용으로 사용되었으며 적어도 13세기에는 배추가 국내에서 재배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확인된다.
이후 16세기부터 국내에서 발간된 농사에 관한 책에 배추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이는 조선에서 배추가 나름대로 재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배추가 김치의 재료로 사용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불어 이때의 배추는 결구배추가 아닌 볼품없는 벌어진 배추이므로 겉절이 정도는 할 수 있었겠지만 현재 통용되는 김장김치는 아니다.
학자들은 조선시대 최세진의 『훈몽자회)』, 『중종실록』, 『선조실록』에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던 무역품 목록 가운데 배추 종자가 포함되어 있음에 주목한다. 이는 당대에 국내의 배추 종자를 생산하는 기술이 미숙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조 때의 실학자 박제가는 ‘배추는 중국 북경에서 종자를 가져다 심어야 좋은 것이 생산되고 농가에서 채종한 종자를 3년만 계속 심으면 순무가 되어버린다’라고 적었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 후기까지 계속되었으므로 중국에서 수입하는 귀한 배추씨가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서민들이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배추를 공급하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당시 배추는 여전히 귀한 작물로 서민들 용은 아니었다.
학자들은고려 시대에 한국으로부터 전해진 배추는 속이 차지 않고 상추처럼 퍼지는 비(非)결구배추라고 분명히 말한다. 18세기 말 이후 중국에서 속이 든 결구배추가 새로이 도입되었는데 때때로 잡종이 생기면서 반(半)결구배추가 개성과 서울 쪽에 자리를 잡았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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