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의 비밀, 과학으로 본다

사리의 비밀, 과학으로 본다(5) : 한국의 진신사리

Que sais 2021. 7. 20. 07:10

https://youtu.be/1WGijH4ZTZ8

강원도 정선 태백산 정암사 적멸보궁

정암사의 옛 이름은 갈래사(葛來寺). 갈래사적기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말년에 강릉에 있는 수다사(水多寺)에 머물고 있었다. 어떤 날 꿈에 스님이 나타나 내일 대송정에서 보자고 했다. 자장율사가 대송정으로 갔더니 문수보살이 꿈에 나타나 태백산 갈반지(葛蟠地)에서 만나자고 한 후 사라졌다. 스님은 태백산으로 들어가 갈반지를 찾다가 큰 구렁이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이곳이 바로 그곳이라며 석남원(石南院)을 지었다. 이곳이 바로 갈래사라는 것이다.

 

갈래사 건설에 얽힌 또 다른 설화는 자장율사가 처음에는 사북에 있는 불소(佛沼) 위쪽에다 사리탑을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탑을 쌓으면 자꾸 무너져서 기도를 했더니 하룻밤 사이에 칡넝쿨 세 갈래가 눈 위로 뻗어나가 지금의 수마노탑적멸보궁, 그리고 요사채가 있는 곳에 멈추었다. 자장율사는 이곳이 바로 건물과 탑을 세울 곳이라 하여 사찰을 짓고 이름을 갈래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갈래사는 창건과 함께 3개의 보탑을 세웠는데 북쪽의 금봉대에 금탑, 남쪽의 은대봉에 은탑을 세우고 가운데에 수마노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중 수마노탑은 인간이 쌓은 탑이지만 금탑과 은탑은 도력으로 지은 것이라서 물욕이 많은 중생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고 전해진다.

적멸보궁의 상식이지만 정암사 적멸보궁에도 불상은 없다. 다만 부처가 앉아 계신 것을 상징하는 붉은 색 방석이 수미단 위에 놓여 있을 뿐이다. 사리가 모셔진 곳이 바로 빈 방석 너머 장방형으로 난 창문 밖에 서 있는 수마노탑(국보332호)에 봉안되어 있다. 수마노탑은 7층 모전석탑으로 높이는 9m 가량이다.

모전석탑은 돌을 가공해 벽돌모양으로 만들어 전탑과 비슷한 형식으로 만든 석탑으로 한국에서는 목탑에 이어 축조되었다. 전탑을 만드려면 먼저 점토를 구해 벽돌을 구워야 하는데, 당대에 충분한 양의 재료를 확보하고 벽돌을 만든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며 석탑도 큰 돌을 구해야하므로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신라에서 가공이 쉬운 사암이나 석회암, 한국에 흔한 화강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탑의 재료로 사용했다. 돌을 가공해 벽돌처럼 지은 석탑이라는 뜻으로 모전석탑으로 부르며 대표적인 탑이 경주의 분황사 모전석탑과 수마노탑이다. 

수마노탑의 탑신을 구성하고 있는 석재는 수성암질의 석회암으로 판석의 길이는 3040cm , 두께 57cm 정도다. 상륜부는 화강암으로 조성한 노반(露盤)위에 모전석재를 올리고 다시 그 위에 청동제 상륜을 설치한 탑이다. 자장율사는 이곳에서 입적했다.

 

강원도 고성군 금강산 건봉사

삼국유사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최초로 사리가 전달된 것은 신라 진흥왕 10(549)으로 양나라에서 사신으로 입학승 각덕과 함께 파견하면서 부처의 사리를 전하자 왕은 백관으로 하여금 흥륜사 앞길에 나아가 맞이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에는 선덕여왕 12(643)에 자장법사가 당나라의 오대산 태화지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불정골(부처의 정골 뼈)와 치아사리 등 백 개와 부처님이 입었던 가사 한 벌을 가져왔다고 한다.

자장법사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황룡사 탑과 태화사 탑, 그리고 통도사 불단에 나누어 봉안했으며 추후에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정선 정암사, 영월 법흥사, 오대산 월정사 등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5대 적멸보궁이다.

 

건봉사 석가모니 진신사리(친견 가능)

그런데 임진왜란 때 왜군이 통도사의 금강계단에 모셔진 사리를 탈취해가자 선조38(1605) 사명대사가 강화사로 일본에서 이를 되 찾아와서 한국 4대 사찰 중에 하나인 금강산 건봉사에 봉안했다. 또한 경종 4(1724)구층사리탑을 세워 다시 봉안하고 영조 2(1726)석가여래치상탑비를 세웠다. 한편 건봉사에는 사명대사의 사리와 치아도 보존하고 있다.

사명대사에 의해 봉안된 건봉사 진신 치아사리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것은 19866사리탑이 도굴되면서부터다. 금강산 건봉사는 당시 민통선(DMZ) 안에 위치했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출입이 어려워 관리가 소홀한 틈을 타 전문도굴꾼이 절취해간 것이다. 알려진 이야기로는 사리를 훔쳐간 일당들이 절취 후 꿈에서 절에 사리를 돌려보내라는 부처의 소리를 며칠 동안이나 꾼 후 사리를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건봉사의 송담(松潭) 스님은 총 12과 중 8과만 회수되고 4과는 행방이 알려지지 않았다.

건봉사의 사리는 4중 사리함으로 장엄되어 있는데 19968과 중 3과를 다시 적멸보궁에 봉안하고 나머지 5과는 일반신도들이 친견할 수 있도록 염불만일원에 안치했다. 건봉사 진신 치아사리는 각각 크기가 다른데 은은한 진주빛을 띠며 온도의 변화에 따라 색깔이 변하는 특징이 있다고 알려진다.

 

. 대구광역시 비슬산 용연사 적멸보궁

비슬산(琵瑟山) 용연사(龍淵寺)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 비슬산에 있는 작은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 그러나 창건 연대는 매우 높아 신라 신덕왕 1(912) 보양국사(寶讓國師)가 창건했다. ()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용연사(龍淵寺)라 불린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선조36(1603)사명대사(四溟大師)의 명령으로 재건되었으며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 현존 당우로는 극락전· 영산전· 명부전· 삼성각· 안양루. 사명당. 선열당. 심검당. 유정당 등이 있다. 1728년 세운 다포식 맞배지붕의 극락전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이며 극락전에 모셔진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제1813, 묘법연화경4~7보물 제961-3이며 3층 석탑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8이다.

 

용연사가 유명한 것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금강계단(보물 제539)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리는 원래 통도사에 있던 것으로,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때 일본에서 갖고 와 금강산으로 모셔가던 중 제자 청진(淸振)을 시켜 사리 1과를 용연사에 봉안토록 한 것으로 진신사리가 봉안되었다는 확실한 기록으루 갖고 있다. 특히 금강계단은 1673년에 완성되었는데 통도사 불사리계단(佛舍利戒壇)의 형태를 본떠 만들었다.

 

대구시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에 용연지라는 못이 있었는데 이곳이 용연사의 이름이 태어난 배경이다. 이 못은 주변마을 사람들의 식수와 농업용수 공급에 중요한 역할을 하여 가뭄이 들어도 주민들은 이 못에서 부족한 물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주민들은 매년 정월 초 제사를 올려 그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였다.

그런데 이런 평온한 지역에 외적이 침입하자 마을 주민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맞서 싸워야하지만 농사를 짓던 농부들이므로 목숨을 거는 위험한 일이라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외적의 공격은 더욱 거세지마 마침내 일곱 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마을을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발 벗고 나섰고 이들 덕분에 외적을 물리칠 수 있었지만 청년들은 모두 전사하였다.

세월이 흘러 청년들이 죽은 지 몇 년이 지나자 못의 물이 이유 없이 계속 마르기 시작했고, 결국은 바닥이 거의 드러났다. 못은 지역 주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물을 공급했으므로 그 심각성이 높았는데 주민들은 일곱 명의 청년들이 한이 남아 이 못을 떠돌아다닌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영령을 기리는 제사를 매년 크게 치러주었다. 그랬더니 그 이후로는 신비롭게도 못의 물이 다시 불어났다고 한다. 이런 역사도 있는데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도 봉안하고 있으므로 용연사(龍淵寺)라는 이름이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다.

 

⑧ 구미 냉산(태조산) 도리사 적멸보궁

구미 도리사 한국 내에서 신라불교 초전법륜지’, ‘신라불교 발상지’, ‘해동 최초가람’, ‘적멸보궁’  다양한 수식어를 가진 천년고찰이다신라 19 눌지왕 때인 417 고구려 승려인 아도화상 불교가 없었던 신라를 포교하기 위해 처음 세운 신라불교의 발상지이는 불교가 법흥왕 14(527) 신라의 국교로 정해지기 110 전의 일로 무려 1600년이 넘는다그러므로 도리사 경내에서  4.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일주문에도 ‘해동 최초 가람성지 태조산 도리사(海東最初伽藍聖地太祖山桃李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아도화상이 수행처를 찾다가 겨울인데도 복숭아꽃과 오얏꽃 활짝  모습을 보고 상서로운 땅임을 알아보고 이곳에 사찰을 짓고 복숭아() 오얏() 이름을  사찰이름을 도리사 정했다도리사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다는 것은 근래의 일로 1976 세존사리탑 보수공사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하러   모셔온 진신사리가 금동육각사리함(국보 208)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도리사에서 적멸보궁을 건설했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