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를 어디에 모실까?>
부처의 사리를 진신사리, 불경을 법(法)사리, 고승의 사리를 승사리로 구분하는데 이 중에서 승사리를 모신 탑은 부도(浮屠)라 하여 일반 불탑과 다른 형태로 제작한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4세기 후반이지만 부도가 만들어진 것은 신라 하대인 9세기부터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탑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안전하고 영구적으로 보관하기 위한 구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탑의 어느 부분에 사리를 봉안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이 단원은 강우방 박사의 글을 인용했다.
인도의 스투파는 안다 내부까지 이어진 야슈티(찰주) 아래에 석가모니의 사리가 봉안된다. 중국에서는 목탑의 경우 심주(心柱) 아래에 봉안되는데 지표 아래에서 3미터 가량 깊이에 거대한 심초석을 두고 그 위에 심주를 세우므로 모두 탑의 지하에 봉안하는 지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엔 목탑⋅석탑⋅전탑의 사리 봉안 위치가 모두 다르며 매우 다양하다.
목탑의 경우 심주 아래에 사리를 봉안하는데 심주 바로 밑에 석함(石函)을 두고 그 아래에 사리를 안치하는 방식, 백제의 제석사지 목탑터의 경우처럼 심초석은 지표로 올라오고 그 위에 심주를 세우는 방식이며 마지막으로 심주가 2층 탑신부터 올려져 있는 예로 쌍봉사대웅전이 유일한 예이다.
석탑의 경우에는 사리의 봉안 장소에 일정한 규칙이 없는 듯 보일 정도로 석탑의 여러 군데에서 사리함이 발견되는데 큰 틀에서의 규칙은 있다. 초기 석탑인 경우 목탑 관습에 따라 찰주가 끝나는 3층 탑신에 사리를 안치했으며 그 후 시대가 흐르면서 2층 지붕돌과 탑신돌을 거쳐 1층 탑신으로 사리 봉안의 위치가 정착된 것으로 추정한다. 예외적으로 석탑임에도 불구하고 김천 갈항사지 삼층석탑과 울산 청송사지 삼층석탑의 경우에는 기단에 사리를 안치했고 익산왕궁리오층석탑처럼 기단과 탑신부에 사리를 나누어 안치한 경우도 있다.
지표에 설치되는 목탑 심초석의 경우나 탑 안에 사리가 안치되는 석탑은 모두 돌 자체에 사각 혹은 원형의 사리공을 파고 그 내부에 사리를 봉안했다. 목탑의 심초석에 판 사리공은 모두 사각이고 석탑도 초기 석탑은 사각으로 파여졌으나 9세기 이후의 석탑은 원형이다.
전탑의 경우 안동 임하사 전탑 터에서는 특이하게 심초에 사리를 안치했지만 대부분의 전탑은 별도의 석함을 제작하여 그 안에 사리와 공양물을 넣은 후 다시 그 함을 벽돌로 된 사각의 공간 안에 넣었다. 특이한 것은 벽돌로 탑을 쌓으면서 마련된 사각의 공간 안에 그대로 사리와 공양물들을 넣어도 되는데, 굳이 석함을 만들어 그 내부에 사리를 넣었다는 점이다.
이는 처음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할 때 ‘돌-동-은-금-수정’의 순서대로 넣어 봉안했던 전통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우리나라 목탑의 심초석과 석탑의 사리공은 외함(外函)의 기능을 겸하고 있으며, 전탑에서 석함을 따로 만들어 넣은 것은 이러한 방식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승사리를 모신 탑은 부도(浮屠)라 하여 일반 불탑과 다른 형태로 제작한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4세기 후반이지만 부도가 만들어진 것은 신라 하대인 9세기부터이다.
이 시기는 당나라부터 선종(禪宗)이 들어온 때로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중심으로 선풍(禪風)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선문을 대표하는 조사(祖師)의 설법이나 교훈을 어록으로 남기고 입적한 뒤엔 장골처(藏骨處)에 조형물을 남겨 추앙했다. 이것이 부도였다. 부도는 다른 석조물과는 달리 탑비(塔碑)가 반드시 별도로 갖춰져 있기 때문에 주인공의 생애와 행적뿐 아니라 당시의 사회․문화상을 알 수 있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스님들로부터 사리가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부처님이나 스님의 사리를 안치한 것을 탑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탑은 보다 부처님과 연계되고 스님들과 연계되는 탑인 경우 일반적으로 승탑(僧塔), 묘탑(墓塔), 또는 부도(浮屠)라고 부른다. 이 중에서 부도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탑과 부도는 배치에도 차이가 난다. 탑은 주로 사찰의 중요 부분에 배치되지만 부도는 보통 사찰의 입구나 외곽 등지에 위치한다. 또한 부도는 여러 개가 한 곳에 모여 있어 부도밭이라고 부른다.
부도는 그 형태에서도 일반 탑과는 다소 다르다. 탑이 주로 3층 이상인 반면에 부도는 단층이다. 대체로 석종(石鐘)의 모양이나 8각원당형을 이루고 있다. 통일신라의 전남 화순군 이양면 증리 쌍봉사 철감선사탑, 고려 초기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갑사, 경기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터 원종대사 부도 등은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형태를 갖고 있다.
석종 형태 부도로는 경기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신륵사 보제존자 부도,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갑사 부도밭의 부도 등이 유명하다. 보제존자 석종은 통도사 금강계단 사리탑이나 금산사 방등계단 사리탑과 유사하나 규모가 작고 간략화되어 있다.
부도로 다소 특이한 형태는 강원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진전사터 부도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도의선사 부도로 추정하는데 2층으로 된 탑 모양의 기단부 위에 팔각원당형 탑신부를 갖고 있다. 전체적으로 탑형 부도에 속하면서도 팔각원당형을 갖추고 있다.
부도 가운데 일반 탑의 형태와 아주 흡사한 것도 있고 매우 다른 것도 있다. 물론 탑과 유사하더라도 그 규모나 형태에서 다소 다르다. 우선 크기가 탑보다 전체적으로 작으며 다소 규모가 크더라도 단층 내지 2층 정도에 불과하다. 또는 매우 특이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흥법사터염거황상탑, 지광국사 현묘탑, 흥법국사 실상탑, 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복동 인각사 보각국사탑 등이다. 현묘탑은 탑과 같은 기본적 구조를 하고 있으며 실상탑은 중앙에 원형의 구를 첨가하여 매우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탑이라 부르는 부도들은 대부분 화려하지만 종 모양의 부도들은 대개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석종 부도는 대부분 부도밭에 함께 있어 탑보다는 보다 인간적인 냄새가 많이 풍긴다는 평도 있다. 사찰에서 발견되는 이들 부도야 말로 인간으로 한 번 태어난 후 모든 것을 벗어버린 표상이라고 표현하는 학자들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로 가장 오래된 부도는 통일신라 시대의 흥법사염거화상탑(844년)이며 이외에 대안사 적인선사조륜청접탑(861년), 쌍봉사철감선사탑(868년) 등이 유명하다.
1998년 11월 성철 스님의 입적 5주기를 맞아 완성된 사리탑은 높이 3.5미터이며 탑 주위는 지름 24미터의 원형 참배대를 설치했다. 성철 스님의 뜻에 따라 조각하지 않고 높이하지 않고, 복제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단 위에 두개의 반구(半球)와 한 개의 구를 포개 놓았다. 이에 대해 성철 스님 평소의 뜻과는 달리 사리탑을 너무 거창하게 만들었다는 비판도 있다. 우리 나라에서 대리석을 정밀하게 다룰 수 없어 일본 기술을 빌려온 것도 비판의 대상이다. 그러나 부처님 다음으로 가장 많은 사리가 나온 성철 스님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이와 같은 사리탑도 오히려 부족하다는 사람도 있다. 사실 성철 스님이 입적한 후 사리를 보기 위해 하루 2만 명 이상의 참배객이 몇 시간씩 기다렸던 사실을 보면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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