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부처님이 쿠시나가라(Kusinagara)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서 열반에 든 후 제자들이 유해를 화장하여 나온 사리를 나누어 불탑을 건립하였다고 전해지는데, 탑이란 바로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무덤으로 자연히 불교도들에게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돌이나 흙, 나무 등 탑의 재질에 관계없이 탑의 심초석(心礎石)이나 기단부, 또는 탑신부(塔身部) 등에 사리 안치소(安置所)를 만들어 사리를 봉안하였으며, 이러한 사리를 보호하거나 장엄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리기와 그에 관련된 사리장엄구가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사리구(舍利具)는 사리를 불탑의 사리공(舍利孔)에 안치할 때 사용하는 용기나 함께 봉안되는 공양물(供養物) 등을 통틀어서 가리키는 말이다. 의식에 맞추어 사리를 봉안하는 데 필요한 기구(器具)를 빠짐없이 갖추어 둔 것이라는 뜻에서 ‘사리갖춤’이라고도 하며, 문양이나 공예품, 보옥 등으로 부처의 정토세계를 나타내고 있다는 의미에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라고도 한다.
돈황 148굴의 벽화 : 부처가 열반한 후 제자들이 유해를 화장하는 모습을 그렸다.
우리나라의 경우 처음에는 중국을 통해 들여온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여 탑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그 수효의 부족으로 깨끗한 모래와 수정, 보석류와 같은 광물을 사리로 이용한 대용 사리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
송림사오층전탑(松林寺五層塼塔)에서 발견된 사리구는 사리를 담은 녹색 유리사리병과 표면에 고리 모양의 무늬(환문(環文)) 장식된 녹색 유리잔을 금판과 금봉(金棒)을 조립하여 만든 전각(殿閣) 형태의 사리기에 안치한 독특한 형식을 취하였다. 또한 왕궁리오층석탑(王宮里五層石塔)에서 발견된 사리병은 둥그런 몸체에 잘룩하고 긴 목 위로 연꽃봉오리 형태의 금마개를 덮은 세련된 모습으로, 우리나라 사리병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걸작으로 꼽힌다.
삼국시대의 사리장엄구는 현재 남아 있는 탑의 수효가 적어 그다지 많은 예가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나라에 사리가 전래된 것은 549년에 중국 양(梁)나라의 무제(武帝)가 심호(沈湖)를 통해 신라 진흥왕에게 보낸 것이 가장 이른 기록이다. 또한 588년에 백제에서 승려와 불사리(佛舍利)를 보냈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을 참고해볼 때 삼국시대 6세기 후반쯤에 사리공양과 함께 사리장엄구가 제작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더구나 근래 부여 능산리(陵山里) 목탑터 아래의 심초석 위에서 567년에 제작된 화강암제사리감(백제 창왕명석조사리감 : 높이 74㎝(국보 288호))이 출토되면서 6세기 중엽경에 사리장엄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조사 당시 감실의 내부에서 유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지만 삼국시대 유물로서는 처음으로 사리 공양자와 그 연대를 정확히 밝히고 있어 가장 이른 시기의 예로 알려진다.
삼국시대의 대표적 사리구인 분황사모전석탑(芬皇寺模塼石塔)의 사리장엄구는 석함(石函) 속에서 분황사 창건 때에 납입되었던 은침통, 금·은바늘과 가위, 금동제장식품 등의 사리공양품과 함께 그 이후 탑의 개보수 때 추가된 것으로 판단되는 고려시대 동전과 은합 등 많은 양의 생활용품이 발견되었다. 초기의 사리장엄구에는 사리기 이외에 사리 봉안 의식에 참여한 왕실과 귀족들의 물품 공양이 마치 고분에 부장품을 넣듯 행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분황사 모전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석함 속에 은합, 은침통, 금은 바늘, 가위, 동전 등이 들어 있었다. 이러한 물건들은 탑의 건립에 관여했던 선덕여왕의 유품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으나 당시에 사용되던 물건을 함께 넣었다는 의견도 있다.
통일신라 682년에 제작된 감은사(感恩寺)동서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기는 상자형의 청동외함과 기단에 보개를 덮은 모습의 내사리기, 그리고 이 내사리기 안에 수정제사리병을 안치하여 본격적인 사리장엄 형식을 갖추게 된다. 이 감은사 사리기의 방형 외함에 장식된 사천왕상은 이국적인 무장(武將)의 모습을 하고 있어 당시 통일신라 미술의 국제적인 면모를 반영해준다.
한편 황복사탑(皇福寺塔)에서는 방형 금동함 안에 크기를 줄여가며 은합과 금합, 녹색 유리사리병을 넣은 사리용기 세트와 함께 순금제불상 두 점이 발견되었다. 시대를 약간 달리하여 봉안된 것으로 추정되는 정교한 이 두 점의 불상은 당시 불교 조각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역시 나원리석탑(羅原里石塔)에서도 사리기와 함께 금동소탑과 작은 금동불이 발견되어 이를 통해 당시 사리장엄에서 사리 이외에 불상과 소탑·경전 등이 함께 납입되기도 하였으며, 이들은 부처의 유골인 진신사리와 같은 의미를 지닌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익산 왕궁리오층석탑에서는 진신사리를 모신 사리장엄구와 함께 열아홉 매의 순금제금강경판(純金製金剛經板)이 함께 발견되어 우리나라의 사리신앙에서 법신사리가 중요시되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통일신라 중엽에 와서는 황복사탑에서 처음으로 납입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출토되었는데 이 경전에 따라 99개, 혹은 77개의 작은 탑을 만들어 그 하나하나에 다라니를 봉안하게 되었고, 이러한 탑을 '무구정탑'이라 했다. 처음에는 황복사탑 금동외함이나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의 금동원합(金銅圓盒)처럼 사리기 외면에 99기의 탑을 새기는 단순한 형식이었다가 9세기에 들어오면서 선림원터탑와 해인사묘길상탑에서 발견된 것처럼 실제로 77개 혹은 99개의 흙이나 납석으로 만든 소탑을 사리기와 별도로 넣게 된다.
고려시대 사리기 역시 신라의 전통을 일부 따르면서도 여러가지 새로운 요소가 첨가된다. 즉 전각형이나 복발형과 같은 복잡하고 화려한 모양에서 원통형, 육각당형(六角堂形)과 같은 단순한 형태로 바뀌며 그 바깥 용기를 청동제 대신에 도자기로 삼은 예가 많아진다. 또한 유리제 사리병이 차츰 수정이나 금속제병으로 바뀌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예를 잘 보여주는 것이 고려 후기에 제작된 수종사(水鐘寺) 부도 출토 사리기로서 중국 원나라의 대형 용천요(龍泉窯) 청자항아리를 사용하여 외사리기를 삼고, 그 내부에는 팔각의 지붕과 투각된 창호(窓戶)로 구성된 육각당형의 은제사리기와 수정제사리병을 안치한 형식이다. 고려시대 사리기의 독특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라마탑의 외형을 지닌 다층 사리기와 수정제의 사리병 상부에 여러 층의 상륜을 장식한 형태로서 이는 고려 말 원나라를 통해 들어 온 라마 불교의 영향이다.
금강산에서 출토된 이성계 발원의 사리기(1390∼1391년)는 여기에서 조금 변화·발전된 양상을 보여주는데, 가장 바깥에 놓이는 용기를 백자로 만들고 내부로 가면서 동제의 발(鉢)과 팔각당형 사리기, 다시 이 안에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라마탑의 모습을 한 내사리기, 원통형 유리제사리병을 안치한 형식이다. 이처럼 고려 후기에는 원나라 불교가 고려로 유입되어 탑과 사리기, 불상 등에서 라마 불교 미술의 영향이 폭넓게 반영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사리장엄구는 불탑과 함께, 스님들의 부도(浮屠)와 불상 안에 넣는 복장 유물에서 많은 수가 발견된다. 사리기의 형태는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매우 다양해졌고, 뚜껑이 있는 원합(圓盒)이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또한 바깥 용기가 고려 말에서부터 사용되던 백자 또는 대리석 등으로 바뀌었고, 내부에 안치되는 사리기는 후대로 가면서 청동제보다는 놋쇠(유제(鍮製))가 널리 쓰인 점을 볼 수 있다. 사리병은 유리 대신 수정·옥·호박(琥珀) 등으로 다양하게 만들어지며, 음양오행설(陰陽五行設)에 따라 오색실·오곡(五穀)·직물 같은 여러 가지 공양품을 함께 넣는 것도 조선시대의 특징이라 하겠다.
사리신앙이 확산되면서 불탑 안에 사리를 봉안할 때 사용하는 의식과 기구들도 함께 발달하게 되었다. 사리구는 불법(佛法)의 상징인 사리를 봉안하면서 사용하는 기구이므로 최고의 기술과 재료로 정성을 기울여 제작되었다. 그리고 귀하고 값비싼 보석이나 공예품 등이 공물로 함께 봉안되었으며, 불탑 건립의 경위나 발원하는 내용 등이 기록된 금석문 등도 함께 불탑 안에 안치되었다. 그래서 사리구는 각 시대와 지역의 공예 수준을 보여주는 유물일 뿐 아니라, 각 시대의 사회나 경제 상황 등에 관한 기록을 전해주는 중요한 역사 자료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리구는 불탑이 해체되기 전에는 외부로 드러나지 않으므로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된 상태로 비교적 많은 유물이 전해지고 있다. 나아가 오래된 석탑을 보수하기 위해 해체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유물들이 꾸준히 발견되고 있다.
불탑을 해체ㆍ보수하는 도중에 사리공에서 발견되는 사리구는 크게 사리용기(舍利容器)와 공양소탑(供養小塔), 탑지(塔誌), 기타 공양물 등으로 나뉜다. 사리용기는 사리나 공물을 담아두기 위해 사용하는 그릇으로 ‘사리기(舍利器)’나 ‘사리그릇’이라고도 한다. 한국의 경우 사리그릇은 금ㆍㆍ은ㆍ동ㆍ유리ㆍ수정ㆍ곱돌 등으로 만들어져 그 조류가 다양하며 3, 4, 5겹 등 여러 겹으로 포개어 봉안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리 안쪽에 놓이는 사리기일수록 더 좋은 재료를 사용하며 가장 안쪽의 그릇은 대체로 유리병 또는 수정으로 만든 병을 사용했다.
사리장엄구의 형태는 각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그릇을 거꾸로 엎은 듯한 복발형(覆鉢形), 육각 또는 팔각의 당탑형(堂塔形), 전각형(殿閣形), 원형 또는 방형의 합(盒)·함(函), 항아리 또는 병등 여러 가지다. 이들 가운데 전각형 사리기는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독창적인 형식으로 알려진다.
그것을 다시 은이나 금동, 자기 등으로 된 여러 겹의 용기에 넣어 불탑에 안치한다. 공양소탑은 불탑 안에 공양의 의미로 함께 넣은 작은 탑 모양의 유물이다. 탑지는 석판이나 동판, 금판 등에 탑을 건립한 경위와 내력 등을 명문으로 새겨 넣은 것을 말한다. 이밖에 불상이나 칼, 청동거울, 유리구슬, 일상용품 등의 공양물들이 함께 발견된다.
이처럼 사리장엄구 가운데는 봉안 당시에 최대의 정성과 기술적 역량을 동원하여 제작된 뛰어난 작품이 많다. 아울러 제작 시기는 물론 공양자나 그와 관련된 발원문 등을 기록한 경우가 많아 이를 토대로 한국 금속공예의 흐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어 더없이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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