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의 비밀, 과학으로 본다

사리의 비밀, 과학으로 본다(4) : 한국의 진신사리

Que sais 2021. 7. 20. 06:48

https://youtu.be/1WGijH4ZTZ8

 강원도 평창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삼국유사일연 스님오대산국내의 명산 중에서도 가장 좋은 곳이요불법이 길이 번창할 곳이다라고 말했다. 풍수지리가도 이곳을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라 하여 천하의 명당으로 꼽는데비로봉 아래 적멸보궁이 있다.

삼국유사는 이렇게 전한다.

 

태화지(太和池) 옆 문수석상에서 7일 동안 정성껏 기도했더니 홀연 대성(大聖)이 네 구절의 ()를 일러줌으로 깨어서 기억해 보았으나 모두 범어라서 알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 한 승려가 비단 금점 가사 한 벌, 바리때 한 벌, 불두골 한 조각을 가지고 법사에게 와서 어찌하여 무료하게 앉아 있느냐고 물었다. 법사는 꿈에 받은 네 구절의 게송이 범어라 그 뜻을 알 수 없어 그렇다고 말했다. 이에 승려가 가라파좌낭은 일체 법을 안다는 말이고, 달예다가야는 자성(自性)이 가진 것이 없다는 말이고, 낭가사가낭은 이렇게 법성을 안다는 말이고, 달예노사나는 곧 노사나불을 본다는 말이다며 풀이해 주었다. 승려는 가사 등을 주며 이것은 본사(本師) 석가세존께서 쓰시던 도구이니 잘 간직하라하고 또 이르되 네 본국 동방의 명주 경계에 오대산이 있어 1만의 문수가 상주하고 있으니 찾아가 보아라하고는 홀연 사라졌다. 법사가 두루 영적이 있는 곳을 심방하고 본국으로 돌아오려 태화지를 지나오는데 못에서 이 나타나 재를 올려달라 청하여 7일을 공양하고는 말하기를 전에 게송을 전하던 노승이 바로 문수의 진신입니다고 말했다.’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신라로 돌아온 자장율사는 중국 오대산과 닮은 산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다섯 봉우리가 평평한 대지(臺地)강원도 오대산을 찾아냈는데 오대산은 바위와 암벽이 별로 없는 육산(陸山)이라고 한다. 육산이란 어머니의 품과 같은 흙이 있어서 동물은 물론이고 식물들이 잘 자라는 산이란 뜻으로 자장율사가 그곳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했고 중국 오대산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적멸보궁에 모셨다.

 

 

한편 다른 적멸보궁들은 어디에 진신사리를 모셨는지 그 위치가 명확한데, 이곳은 사자암 건물 뒤편 땅 어딘가라는 '전설'만 전할 뿐 위치가 불명확하다. 전설에 따르면 그 자리가 풍수지리적으로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용의 형상이라 무거운 석물 사용을 금하므로 부득이 눈에 띄는 석물을 설치하지 않고 진신사리를 땅에 묻었다고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도적이 진신사리를 훔쳐가지 못하도록 묻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사리를 모신(643년 추정) 이후 1000년이 넘어 많은 일화들이 생겼지만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도 등장한다. 주원장이 자신의 무덤을 위해 5명의 지관에게 명당을 찾으라 명했다. 지관들이 중국 각지를 뒤졌지만 명당을 찾지 못하고 조선까지 넘어왔다. 조선 산야를 뒤지던 지관들은 오대산 적멸보궁 터를 발견하고는 황제의 유택에 알맞은 곳을 드디어 찾았다고 지형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 5명은 마른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을 맞고 모두 죽었다고 한다. 적멸보궁은 일개 왕이 들어갈 자리가 아니라 대웅(大雄)이 머물 곳이기 때문에 다른 마음을 먹어서는 누구도 화를 면치 못한다는 얘기다. 여하튼 사찰에서는 사자암 뒤편 어딘가에 진신사리가 있다고 전하고 믿으므로, 사자암 측은 그 근처에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금지한다.

중대사자암은 다층석탑을 연상시키는 계단식 5층 건물이다. 오대산의 5()를 상징하여 지었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또 이렇게 전한다. 중대에 문수보살이 계시니 사자암을 세웠다는 것인데 문수보살은 사자를 타고 다닌다.

 

 강원도 인제 설악산 봉정암 적멸보궁

설악산 소청봉 서북쪽 중턱에 천하의 승경 봉정암 적멸보궁이 있다. 자장율사양산 통도사와 경주 황룡사 9층탑 사리를 봉안했으나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보다 신령한 장소에 봉안하고 싶어 발길을 북으로 돌린 스님은 먼저 금강산을 찾아 기도했는데기도를 시작한지 7일이 되자  갑자기 하늘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오색찬란한 봉황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자장율사는 기도의 감응으로 알고 봉황새를 따라갔는데봉황새는 높은 봉우리 위를 선회하다 갑자기 어떤 바위 앞에서 자취를 감추어 유심히 살펴보니 봉황이 사라진 곳은 바로 부처님의 이마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불두암 중심으로 좌우에 일곱 개의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있는 듯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었다.

 

자장율사는 부처님의 형상을  바위 밑에 불사리를 봉안하고 5층탑 세우고 암자를 지었는데 이름은 봉황이 부처님의 이마로 사라졌다 하여 ‘봉정암이라 붙였다고 한다. 선덕여왕 13(644)의 일이다.

자장율사의 간절한 기도에 의해 절터를 잡은 봉정암은 불교 신앙의 성지로 정착되었는데 원효대사가 지를 순례하다가 문무왕 17(667)경 잠시 이곳에 머물며 암자를 새로 지었다.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대사도 이곳을 참배했으며,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 지눌1188년이 이곳을 참배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봉정암은 지금까지 아홉 차례의 중건과 중창이 있었는데 1923백담사에 머물던 만해 한용운은 백담사전기에 인조 10(1632)에는 설정(雪淨)화상이 다섯번째 중창을 할 때 탱화를 새로 봉안하고 배탑대(拜塔台)를 만들었으며 누각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설악산 전투로 봉정암의 모든 건물이 전소되어 5층 사리탑만이 외롭게 서 있다가 1985년 이후부터 현재의 봉정암의 모습을 갖추었다.

 

강원도 영월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

법흥사가 처음 창건된 것은 신라 선덕여왕 때인 7세기 중엽,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자장이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오대산, 태백산, 설악산과 사자산을 오가며 기도를 했다. 자장율사는 이때 당에서 가지고 돌아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의 일부를 기도하는 곳마다 봉안했는데 사자산도 그 중의 하나다.

 

자장율사가 처음 창건할 때의 사찰명은 흥녕사(興寧寺)며 우리나라 불교사에 뚜렷한 이름을 남기게 되는 것은 신라 말 헌강왕 때 징효절중(澄曉折中)에 의해 이곳에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이 들어서면서부터다.

구산선문홍척(洪陟)국사가 남원 실상사(實相寺)에 개창한 실상산문, 도의(道義)국사를 스승으로 하는 보조체징(普照體澄)이 장흥 보림사(寶林寺)에서 개창한 가지산문(迦智山門), 범일(梵日)국사가 강릉 굴산사에서 개창한 사굴산문, 혜철(惠哲)국사가 곡성 태안사에 개창한 동리산문, 무염(無染)국사가 보령 성주사에서 개창한 성주산문, 도윤(道允)국사를 스승으로 하는 징효가 영월 흥녕사에서 개창한 사자산문, 도헌(道憲)국사가 문경 봉암사에서 개창한 희양산문, 현욱(玄昱)국사가 창원 봉림사에서 개창한 봉림산문, 그리고 이엄(利嚴)선사가 해주 광조사에서 개창한 수미산문을 말한다.

그러나 진성여왕 5(891)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흥녕사는 전쟁 중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 뒤 고려 혜종 1(944)에 다시 중건됐으나 다시 화재가 일어난 뒤로부터 사자산문도 급격히 몰락의 길을 걸었다. 사자산문이 문을 닫은 후부터는 불사리탑을 공양하는 작은 절로만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1902년 비구니 대원각(大圓覺)스님이 중건을 하면서 법흥사로 사명을 바꾸었다.

1931년 산사태로 옛사지 일부와 석탑이 유실되자 1933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1939년 적멸보궁만을 중수한 후 중창불사를 거듭해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법흥사에 현존하는 건물은 적멸보궁을 비롯하여 1968년에 세운 무설전, 1980년에 수리한 노전, 1987년에 건립한 산신각, 1985년에 세운 요사채 2, 1992년에 세운 대형 객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