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대표적인 상징물로는 탑ㆍ불상ㆍ불경ㆍ사리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핵심을 차지하는 것이 사리라고 할 수 있다. 사리는 본래 ‘신체’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Sarira’에서 유래했는데, 이를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하여 사리라(舍利羅)라고 하였다가 줄여서 사리라 부르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사리를 중시하게 되었는가는 사리의 기원에 대해 알아보면 쉽게 풀린다.
‘석가모니는 약 40년간 거리에서 가르침을 전하고 여든 살에 인도 북동부의 쿠쉬나가라에서 생애를 마쳤다. 석가모니의 시신은 이웃 부족인 말라족이 인도 장례 풍습에 따라 화장하였는데 몸 전체가 사리여서 8가마 4말의 사리가 나왔다.’
당시 인도의 도량형이 지금과 같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정확한 양은 알 수 없으나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많은 양이었음은 추측할 수 있는데 학자들은 다비를 하고 나온 재까지 모두 합친 분량으로 추정한다. 다비(茶毘)란 불교계의 장례법으로 정착한 화장의 팔리어 원어인 ‘자피타’(jhapita)를 소리 나는 대로 옮긴 것이다.
석가모니의 화장 소식은 이웃 부족들에게 전해져 여덟 개의 부족이 석가모니의 유골을 나누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석가모니의 유골은 여덟 부분으로 나누어졌고 각 부족이 각각 탑을 세웠는데 이를 근본팔탑(根本八塔)이라 한다. 그런데 유골의 분배가 끝난 후 석가모니의 열반 소식을 들은 모라족이 석가모니의 화장터에 남아 있는 재를 가져가 유골 대신 넣은 재탑(灰塔)을 세웠고 각 부족에게 원만하게 석가모니의 유골을 분배를 중재한 드로나(Drona)가 석가모니의 유골을 담았던 병(또는 항아리)을 가져가 유골 대신 병을 넣은 병탑(甁塔)을 세웠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팔탑, 병탑과 재탑을 합하여 근본 10탑이라 설명한다.
약 200년 후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기원전 273〜232)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8개 탑 중 7개의 탑으로부터 사리를 모두 모아 다시 세분하여 무려 84,000의 불사리탑을 건립하여 사리를 깨달음과 진리의 상징으로 받들었다. 이후 탑(스투파)은 석가모니의 유골 즉 사리를 봉안하는 구조물에서 나아가 석가모니의 실재로 인식되었다. 즉 아소카왕의 8만4천 탑 건립에서 진정한 분사리의 원리가 확립됐다.
사리를 숭배하고 공양하는 사리신앙에 의해 탑 신앙이 생겨났으며 부처의 진신사리를 보는 것은 부처를 친견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자리 잡는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탑이란 그 형태와 관련 없이 부처 사리를 모셔 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리는 탑을 세우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건이며 사리 봉안은 탑의 존재 이유이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후 많은 승려들이 앞 다투어 사리를 구하기 위해 인도로 간 이유이다.‘
<사리의 종류>
일반적으로 사리라하면 큰 틀에서 불타(佛陀)는 물론 고승(高僧) 등의 시신을 화장한 뒤 남는 구슬 모양의 작은 결정체를 의미한다. 그런데 불교계에서 의미하는 사리는 이와는 다소 다르다.
불교계는 몸을 의미하는 ‘사리라’가 복수형으로 되면 신골, 유골이라는 뜻을 가지므로 사리는 죽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이를 원용하면 본래 '사리'라는 용어는 구슬 같은 결정체가 아니라, 산스크리트어의 본래 의미대로 시신 자체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특히 스리랑카에서는 치아를 진신사리라고 부른다고 한다.
사리를 불타, 스님, 불자들의 본래 몸 그 자체를 의미한다면 인체를 화장하고 난 뒤에 남겨진 뼈 전체 또는 가루가 된 뼛조각까지 폭넓게 포괄한다. 이런 정의에 의하면 사리에 대해 의심을 품을 여지가 없다. 모든 사람의 신체를 사리로 부를 수 있으므로 사리가 진짜냐 가짜냐로 논란을 펼칠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강우방 박사도 이를 보다 업그레이드하여 설명한다. 사리가 단순히 죽은 자의 몸을 가리키거나 또는 그 뼈를 부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를 향한 믿음이 충만한 불자들이 사리의 의미를 좀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불교계에서는 사리를 세 종류로 설명한다. 석가모니가 입적했을 때 다비식에 의해 나온 진신사리, 고승들로부터 승사리, 그리고 불경 등을 포함하는 법(法)사리이다. 이중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와 승사리는 다비(茶毘)를 통해서 얻어진다.
다비에 의한 장례법이 인도 불교 이래 불교적 전통이 된 요인은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우선 아열대성 기후라는 인도의 기후적 특성 때문에 시신의 부패를 막는데 다비가 적격이며 더불어 부처 시신을 다비로 장례했다는 상징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부처의 사상적 의미를 부여하는데 다비가 적격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다비에는 땅‧불‧물‧바람의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된 육신을 다시 원류로 보낸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세 가지 사리 중에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와 승사리는 정통적인 사리로 설명되는데 사람들을 헷갈리가 만드는 것은 석가모니의 몸에서 8가마 4말의 사리가 나왔다고 하지만 한국으로만 보아도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로 불리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조선왕조 초기에도 사리 신앙은 왕실을 중심으로 매우 성행했는데 태조 이성계는 1393년 4월에 정릉의 흥천사에 사리각(舍利閣)을 건설하고 7일 기도를 올렸는데 이때 사리 4과가 분신(分身, 몸을 나누어서 화현하는 것)하여, 불당을 유동에 건립하고 사리를 봉안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1398년에는 불교를 숭상하는 명나라 태조가 조선에서는 숭불(崇佛)하지 않으므로 보관하고 있는 사리를 거두어 달라고 황엄을 사신으로 보냈다.
태종은 각 도감사에 명하여 사리를 구하도록 명했는데 충청도에서 45과, 경상도에서 164과, 전라도에서 155과, 강원도에서 90과 모두 454매였다. 태조 이성계는 자신이 보장(寶藏)하던 303과를 더하여 모두 747과를 금은합 속에 넣어 황엄에게 넘겨주었다. 태종 7년(1407) 5월의 일로 사리의 크기에 차이가 있겠지만 단순 숫자로 747과라면 엄청난 양이 틀림없다.
세조 때에는 사리에 관한 여러 기록이 전한다. 개성 연복사의 승려가 사리라고 진상한 함을 열어 보니 좁쌀이었다는 기록도 있고 세조 10년(1464)에는 삼각산 장의사에서 사리가 분신하므로 백관이 서한을 올려 경하했더니 이날 오색구름이 나타났다고 한다. 세조는 원각사를 세우고 사리를 봉안했으며 양평의 용문사를 중창하고 사리탑을 세웠으며 양주에는 수종사를 창건하고 사리탑을 세웠다. 세조가 세운 사리탑은 수십 개에 이른다.
놀라운 것은 중국에 보낸 사리가 엄청나게 많은데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현재도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다는 적멸보궁만 해도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로서 헷갈리는 것은 이들을 '참’으로 보아야하는가이다.
1. 진신사리
사리들 중에서도 석가모니를 화장하여 나온 것을 진신사리(眞身舍利)라고 부른다.
잘 알려진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적는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자 제자들이 전륜성왕의 예법에 맞추어 화장을 한 후 불에 타고 남은 뼈 즉 사리를 인근 8개 나라의 대표들에게 분배하였다. 이들이 각국으로 돌아가 탑을 하나씩 세우니, 최초로 세운 불탑이라 하여 '근본8탑'이라고 부르고 이후 재탑과 병탑을 합하여 '근본10탑'이라고 한다.
이후 아쇼카 왕이 인도를 통일한 뒤 불교에 귀의하자, 근본8탑 중 한 기만 제외하고 나머지 탑들을 해체하여 사리를 꺼내 인도 각지에 진신사리를 담은 불탑 84,000기를 세웠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진신사리'라고 주장하는 사리 대부분은 아쇼카 왕이 인도 전역에 세운 불탑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한다.
근본8탑 중 아쇼카 왕이 열지 않은 한 기가 바로 네팔 라마그라마(Ramgram stupa)에 있는 탑이다. 석가모니가 45년 동안, 수많은 길을 오가며 법을 전하는 사이 여든에 접어들었는데 그해 여름 바이살리에서 3개월간의 하안거를 보냈다. 그러나 무더위에 심한 병을 얻어 3개월 후 북쪽 쿠시나가르(Kusinagara)에서 열반했다. 바이살리에 근본8탑이 세워진 것은 석가모니의 어머니가 콜리(Koliya) 왕국 출신으로 석가모니의 사리를 분배받아 사리탑을 세웠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라마그라마 사리탑은 부처의 유물이 있는 유일한 온전하고 원래의 사리탑으로 추정한다. 사리탑은 건립 당시부터 커다란 존경과 순례의 대상이 되었는데 높이 7미터의 이 사리탑은 현재 흙무더기 아래 묻혀 있으며 스투파의 크기는 높이 10m, 지름 23.5m이다.
알려지기는 커다란 용왕이 라마그라마 사리탑을 지키고 있었고 아쇼카가 유물을 발굴하는 것을 방해하여 유일하게 석가모니의 사리를 수습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라마그라마 사리탑은 부처의 유물이 있는 유일한 온전하고 원래의 사리탑으로 알려졌다. 물리학 조사에 의하면 지표면 아래에 완벽한 사각형의 수도원이 묻혀 있다고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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