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석가모니 진신사리>
한국에 그야말로 많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들이 있다고 주장되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근래에 들어 상당수 신흥 사찰들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그동안 수없이 사리에 대한 신뢰를 저하시키는 요인으로 지적되었다.
이강민 박사는 태국이나 버마 스리랑카 등지의 국적불명 스님들의 사리나 석물로 교묘히 조각된 가짜 사리가 진신사리로 포장된다고 설명했다. 즉 진신사리 친견을 빌미로 불자들에게 시주금을 강요하는 사기성 상술이라는 뜻과 다름없다.
사실 신흥사찰에서 사리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신흥 사찰에서 진신사리를 봉안한다는 자체만으로도 대내외적 위상이 달라지며 신자들을 끌어 모으는데 이상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화가 난다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만큼 한국에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매력있는 수단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는 일부 동남아 불교 국가에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갖고 있다는 광고도 나돌고 있는데 이는 사리가 그만큼 환가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신문>, <법보신문>, <현대불교> 2008년 12월 스님이 <불교신문>, <법보신문>, <현대불교>에 다음과 같이 광고를 내었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나눠 드립니다.…보시금 30만 원에 6과·50만 원에 12과를 모셔드립니다.’
<불교포커스> 여수령 기자가 확인한 결과 스님은 돈황석굴에서 발견된 부처님 진신사리 분배하는 것으로 치아사리 2과는 특별상담으로 구입 가능하며 택배로도 배송할 수 있다고 적었다. 이 문제는 석가모니의 사리 자체를 상업화하려는 것에 대한 비난은 물론 이런 광고를 낸 <불교신문>, <법보신문>, <현대불교>에도 불똥이 떨어져 큰 파문을 일으켰다.
광고를 낸 스님이 조계종단이 아니므로 조계종단에서 제재할 수 없다는 내용을 비롯하여 스님이 곧바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했다고 했지만 여하튼 불교계에서 말하는 사리 전체에 대한 의문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사람의 유골로 사리(천옥)를 만들어 주는 회사도 있다는 것이다. 현대 과학 기술 도입하는데 방법도 알려진다.
'약 35분 동안 유골 분말을 기계에 넣고 고열로 녹이면 인공사리 제조(유골 1구당 종이컵 3~4컵 정도의 분량 제조) : 개인별 백색, 회색, 연녹색의 세 가지 색상이 가능하다.'
이런 사리가 석가모니의 진실사리로 둔갑한다는 말도 있다고 알려진다. 특히 이강민 박사는 태국, 버마, 스리랑카의 국적불명 스님 등으로부터 구입 또는 기증받은 사리형 또는 석물로 교묘히 조각된 가짜 사리가 진신사리로 포장되고 있으므로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
이 말을 들으면 한국에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에 대해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한국의 불교계에서 역사적으로 알려진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에 대해서만 설명한다.
우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진흥왕 10년(549), 중국 양나라에서 유학하던 각덕(覺德)이 양나라 황제가 보내는 불사리 몇 과를 모시고 양나라 사신 심호(沈湖)와 귀국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진흥왕은 궁에서 기다리지 않고 흥륜사(興輪寺)까지 마중 나왔다고 전하는데 현존하는 기록에 따르면 양나라에서 들어온 사리가 한반도에 최초로 들어온 진신사리이다. 하지만 이때 들어왔다고 하는 진신사리는 행방이 묘연하다. 이후 576년에 안홍이 중국 진나라에서 불사리를 갖고 돌아와 봉안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타난다.
신라에서는 이후에도 중국에서 불사리를 이운해 왔는데, 선덕여왕 12년(643) 자장 율사가 당나라에서 들여온 사리는 오늘날 한국불교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장은 당나라에서 참선 수행하던 중 문수보살을 만나 불정골(佛頂骨)과 치아사리 등 불사리 100과와 부처님의 옷(가사·비라금점(緋羅金點)) 한 벌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이 불사리를 셋으로 나눠 황룡사탑과 태화사탑, 통도사 금강계단에 안치했으며, 가사는 통도사 금강계단에 사리와 함께 봉안했다.
이 가운데 황룡사탑에 안치한 사리는 황룡사지 발굴과정에서 출토됐으며, 통도사 사리와 함께 현재까지 역사적 근거가 명확한 가장 오래된 진신사리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자장 율사가 통도사에 봉안한 사리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약탈했지만 사명대사가 일본에 건너가 되찾아 오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다. 사명대사는 일본에서 되찾아온 사리를 본래의 자리인 통도사 금강계단에 다시 봉안했고, 이 중 12과를 금강산 건봉사와 대구 용연사에 나눠서 안치했다.
신라에서는 자장 율사 이후 문성왕 13년(851) 원홍이 중국에서 치아사리를 가지고 왔다고 알려진다. 따라서 549년을 시작으로 576년, 643년, 851년 등 네 차례에 걸쳐 중국에서 신라로 불사리가 전해졌으며, 이들 사리는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전국에 불탑이 세워지면서 곳곳에 나눠 안치됐다.
삼국시대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에도 사리가 전해졌다. 중국 당나라 도선이 편찬한 『광홍명집』권 17 경사리감응표에는 ‘신라, 고구려, 백제의 사신이 각각 본국에 가져가 탑을 세워 봉안할 사리 1매씩을 청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이를 모두 허락했다’기록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헌상 고구려와 백제의 사리신앙을 알려주는 직접적 기록이 특별하게 남아 있지 않았으나, 왕흥사터 발굴조사 과정에서 사리관련 명문이 발견되었다.
백제의 경우 그동안 588년 위덕왕 35년 일본에 불사리를 전했다는 기록만 남아있는데 2007년 10월 왕흥사터 발굴 과정에서 발굴한 사리장엄구에서 당시 사리가 전해졌음을 알 수 있는 명문이 발견되었다. 왕흥사터에서 발굴된 금동, 은, 동 등 삼중으로 된 완전한 형태의 금동사리함 몸통에는 백제왕 창(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2매를 묻었는데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라고 새겨져 있다. 정유년은 577년으로 588년보다 빠른데 이때 이미 백제에서 사리신앙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적멸보궁>
자장율사의 사리는 오대산 월정사(또는 상원사) 사자암, 영월 법흥사, 정선 정암사, 설악산 봉정암 5층 석탑에 봉안되었다. 사리를 모신 절에 불상을 안치하지 않는데 이는 불상의 원천이 부처의 모습을 형상화하였기 때문이다. 즉 진신사리를 안치한 사찰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했는데 굳이 대체물을 만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진신사리를 안치한 건물을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고 부른다.
이들 5곳을 '5대 적멸보궁'이라 하는데 5대 적멸보궁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곳은 통도사와 월정사로 인식하여 ‘야산제일통도사(野山第一通度寺) 고산제일월정사(高山第一月精寺)’라는 말이 전한다. 적멸보궁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곳은 경남 양산 통도사 적멸보궁 금강계단이다. 그러므로 조계종에서는 통도사 금강계단을 합동 구족계 수계식장으로도 사용한다.
한편 조계종 자현(玆玄) 스님은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처음으로 '적멸보궁'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곳이 바로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이며 이후 이 명칭이 다른 곳에까지 퍼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스리랑카의 경우 진신사리를 모셨지만 불상도 봉안하는데 이는 각국의 진신사리에 대한 해석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자장율사로부터 기원한 전통적인 적멸보궁 이외에도 대구 비슬산 용연사, 구미 태조산 도리사, 고성군 금강산 건봉사를 더해 8대 적멸보궁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는 이들 8곳의 적멸보궁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설명한다.
① 경남 양산의 통도사 대웅전 적멸보궁(寂滅寶宮, 국보 제290호)
영축총림 통도사는 자장율사가 최초로 황룡사탑과 함께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으로 전국의 모든 출가자가 계를 받는 불사리계단 즉 금강계단이 통도사의 큰 특징 중의 하나다. 통도사는 불보사찰의 칭호도 갖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옛날 조정의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이 와서 계단을 예배하고 사리를 친견하기 위해 함을 열어 보았는데, 처음에는 긴 구렁이가 석함을 지키고 있었으며, 두 번째는 큰 두꺼비가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통도사의 대웅전 즉 적멸보궁은 여타 건물과는 다소 다르다. 전통사찰의 법당 대부분 한 면이 정면인데 대웅전은 사방이 모두 정면이 된다. 대웅전은 자장율사에 의해 통도사가 창건될 때 초창되었으나 수차례 재건되었고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에 타 다시 건설되었다. 그러나 기단은 창건 당시의 것으로 생각하는데 여느 팔작지붕과는 달리 지붕의 북쪽을 제외한 삼면에 합각이 생기는 丁자 모양으로 만든 특수한 모습이다. 학자들은 금강계단에 참배하기 위한 공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었으므로 이런 특수한 지붕구조로 건설했다고 추정한다.
건물의 동서남북으로 각 면의 현판 내용이 다르다. 금강계단을 직접 대하는 북쪽에는 ‘寂滅寶宮(적멸보궁)’, 남쪽 면에는 ‘金剛戒壇(금강계단)’, 동쪽은 ‘大雄殿(대웅전)’, 서쪽에는 ‘大方廣殿(대방광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적멸보궁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는 뜻, 금강계단이라 함은 영원히 절대로 깨어지지 않는 금강과도 같이 계율을 지킨다는 뜻, 대웅전이라 함은 대웅, 곧 석가모니불을 모신 전각이라는 뜻, 그리고 진리요 우주의 본체인 법신불이 상주하는 도량이라는 뜻으로서 대방광전이란 말을 쓴 것이다.
건물 안에서 금강계단이 바라다보이도록 유리창을 냈다. 내부의 구조는 얼핏 복잡해 보이지만 중앙1칸의 고주를 중심으로 내외진(內外陳)을 형성한 합리적인 구조다.
통도사의 간판이라고도 볼 수 있는 금강계단(국보 제90호)은 대웅전 북쪽에 확보된 널찍한 마당에 장방형의 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 지대석을 깔아 만든 방형의 이중기단의 중앙에 앙련과 복련으로 만든 대좌를 놓고 그 위에 석종형 부도를 모신 모습이다.
금강계단의 금강이란 말은 『금강반야바라밀경』에 의한 것으로 금(金) 가운데 최강(最强)이므로 금강(金剛)이라 이름했다고 하며 또 열반경에는 어느 것이든 금강을 능히 깨뜨릴 물건은 없지만 금강은 일절(一切)의 것을 모두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금강과 같은 반야(般若)의 지혜로 모든 번뇌망상을 부수는데 이러한 지혜는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으로 성취될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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