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프라와와 릿차비 불탑>
학자들은 이 외에도 2곳에 진실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매장되었다고 추정한다. 피프라와 불탑(Piprahwa Stupa)의 불탑과 바이살리(Vaishali)의 릿차비(Licchavis) 불탑이다.
우선 석가모니 열반 때 석가족들이 사리 일부를 받아서 카필라성에 불탑을 세웠는데 이를 피프라와 불탑(Piprahwa Stupa)으로 부른다.
석가가 열반한지 약 3세기 후 인도의 아소카왕(기원전 273〜232)은 석가모니의 삶과 연결된 모든 장소를 방문하는 순례를 진행했다. 그가 순례한 방문지 중 한 곳이 네팔 '테라이'지역에 위치한 '룸비니(Lumbini)' 마을로 석가모니의 출생지이다.
아소카 왕은 룸비니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비문이 새겨진 사암 기둥을 세웠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대관식 20 년 후, 신의 사랑을 받은 프리야 다시(아소카) 왕이 룸비니를 직접 방문하여 그곳에서 사카야의 현자인 부처님이 태어났기 때문에 예배를 드렸다. 그는 그 장소 주변에 돌담을 쌓고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돌기둥을 세웠다. 부처님이 그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는 룸비니 마을을 세금에서 면제하고 농산물의 8분의 1만을 토지 수입으로 지불토록 했다.’
이 글은 룸비니 마을에서 석가모니가 출생한 곳이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막상 석가가 태어난 후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은 카필바스투(Kapilvastu)이다. 29세에 싯다르타 왕자는 진리를 찾아 카필바스투를 떠나 부처로서 깨달음을 얻었지만 자신의 고향인 카필바스투로 살기 위해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카필바스투는 완전히 방치되어 실제 어느 곳인지 확인되지 않을 정도로 잃어버린 도시였다. 그러므로 많은 학자들이 카필바스투를 찾으려고 노력했는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곳이 룸비니 인근이라는 점이다. 한마디로 카필라바투 유적이 룸비니 인근에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카필바스투에 높이 약 9미터이고 둘레 약 39미터에 달하는 벽돌로 쌓은 층급식 원형탑인 피프라와 불탑이 있었는데 당대에 이 탑을 석가모니의 근본 8탑 중 하나로 추정하고 있었지만 확인된 것은 아니다.
1898년, 당시 영국령 인도의 공무원으로 영지를 갖고 있던 윌리엄 클랙스턴 페페(William Claxton Peppe)가 피프라와 불탑을 발굴했다.
그는 대리석으로 만든 돌 상자를 발견했는데 그 안에는 꽃병 3개와 많은 보석들과 함께 5개의 사리기가 출토되었다. 그 중 가장 큰 사리기에 브라흐마 문자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깨달은 성자의 유골을 모신 이 사리함은 석가모니의 형제자매와 그 처자들의 소유에 속한다.’
한마디로 사리8분설에 입각한 석가족이 세운 근본8탑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페페는 정식 고고학자도 아닌데다 석가의 진신사리를 발굴 임의로 처분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영국으로는 커다란 고민거리였다. 결국 영국은 석가모니 사리를 처리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태국의 라마 5세가 석가모니의 유물을 공유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인도의 영국 총독 커존 경은 유물의 일부를 태국에 선물했고 이 유물은 1899년 방콕의 황금산 꼭대기에 있는 왓 사켓 사원 즉 황금사원에 봉안했다. 그러자 일본, 버마, 스리랑카, 시베리아의 불교도들도 부처 유물의 몫을 요청하여 이곳에도 석가의 유물들이 분배되었다. 한편 이때 발견된 진신사리 중 일부는 인도 델리 박물관에 있는데 학자들은 근본8탑인 피프라와 불탑에서 발굴된 사리도 '진짜'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 당시 발견된 사리기에 적힌 브라흐마 문자는 기원전 3세기에 해당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것은 기원전 5세기 석가모니를 화장했을 때보다 2세기 이상이 지났음을 의미한다. 석가모니가 열반한 시기와 비교할 때 석가의 진본 유물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은 페페가 발견한 유물에서 브라흐마 문자가 보이는 것은 불탑을 재건했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석가모니의 초기 및 원본 유물이 페페가 발견한 곳보다 깊은 곳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1971년 정통 고고학자인 K.M 스리바스타바(Krishna Mohan Srivastava) 박사가 2차 발굴을 진행했다. 그는 페페가 발굴한 곳보다 깊은 곳에 진짜 석가의 유물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의 예측은 정확하게 맞아들어 페페보다 년대가 훨씬 상회하는 사리기를 발견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동 석관과 붉은 도자기 접시가 북쪽 방에서 발견되었다. 접시는 세 조각으로 나뉘어 진 같은 종류의 다른 접시로 덮여있었다. 관에는 탄 뼈 조각이 들어있었다. 이어서 크기가 좀 더 큰 또 다른 동석 상자가 발견되었다. 이들은 기원전 5〜4 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므로 페페가 발견한 것보다 년대가 빠르다. 피프라와 불탑이야말로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한 근본 8탑의 실제일 가능성이 높다.’
학자들은 스리바스타바 박사가 제2차 발굴에서 발견한 사리기에 봉안된 뼈를 석가모니 진신 유골로 추정한다. 그런데 피프라와 불탑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윌리엄 페페는 자신의 발굴 보고서에서 금 조각, 진주 및 모든 종류의 보석을 관과 함께 발견했다고 언급했다. 그런데 페페가 기증한 유물은 그가 발견했다는 것에 비추어볼 때 매우 작은 량이다. 학자들은 페페의 여러 정황을 볼 때 자신이 발견한 유물들을 적어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시장에 판매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막상 그들이 발견한 실물이 어디있느냐이다. 페페는 1898년 피프라와 불탑을 발굴하면서 자신이 발견한 유물의 목록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부처 유물 외에 금 항아리, 금 구슬 장식, 2인치 길이의 금박으로 된 여자의 인상, 금박으로 된 나체의 인물, 두꺼운 금박의 커다란 원형 조각, 두루마리, 금박에 코끼리의 인상, 사자가 그려진 조각, 여러 개의 십자형 불교 조각, 은색과 금색으로 6개와 8개의 꽃잎이 있는 꼿, 작지 않은 크기의 금조각, 2, 3, 4개가 용접된 진주, 불교의 삼지창, 피라미드, 구멍이 뚫린 구슬, 자수정, 토파즈, 석류석, 산호, 상감 돌 등이 있다.’
그런데 그야말로 놀라운 사실이 2004년 런던에서 발표되었다.
2003년 6월, 런던 불교 협회의 사무총장 폴 세토(Paul Seto) 박사는 골동품 상인인 필립 트렌트(Philip Trent)와 함께 협회가 보유한 모든 유물들을 보험에 들기 위해 목록을 작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캐비넷에서 초라한 판지 상자를 발견했는데 그 안에 들어 있는 작은 판지 상자에 ‘피프라와 불탑, 1898년, 석가모니의 유물’이라 적혀있었다.
판지 상자는 작은 12개의 구획이 있었고 이곳에는 사파이어, 자수정, 루비 및 암석 크리스탈로 만든 8개의 뾰족한 꽃과 구슬, 작은 진주 모양의 물체, 3개의 진주가 하나로 연결된 큰 물체도 있었다.
세토는 협회에서 발견된 유물에 대해 페페의 가족들이 정보를 갖고 있을지 모른다며 페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2003년 7월 페페의 손자인 네일 페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는 불교협회에서 발견된 상자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지만 피프라와에서 발견된 항아리의 석고 모형과 석화된 것으로 보이는 2개의 상자가 집에 보관되어 있다고 말했다. 상자 안에는 절묘한 금색 별, 잘게 가공된 잎, 섬세한 보석 꽃, 미세 피라미드 모양의 보석, 씨앗 진주, 작은 산호 조각, 코일형 은선, 작은 불교 상징들이 발견되었다. 상자는 100년 이상 페페의 가족들이 보관하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의 집에 세계적인 보물이 있는지를 모른 것이다.
학자들은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석가모니의 8분사리를 피프라와에 보관한 후 약 2세기 후 개조되었는데 이때 누군가가 석가모니의 사리에 추가하여 페페가 발견한 보물들을 추가했다는 것이다. 그 당사자로는 당연히 아소카 왕이라는 것이다.
석가모니가 ‘유마경’을 설법하신 곳으로 잘 알려진 바이샬리에 있는 바이살리(Vaishali)의 릿차비(Licchavis) 불탑도 근본 8탑 중 하나로 추정한다.
기원전 5 세기에 건설된 높이 약 8미터의 진흙 사리탑인데 이후 4번이나 증개축되어 높이 12미터의 벽돌 사리탑이 되었다. 1957〜1958년 아르데카르 박사에 의해서 발굴되었는데 이 때 높이 5.2cm, 지름 4.9cm의 작은 사리병과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사리병에 석가모니의 사리라는 기록은 없었지만 출토 상황과 불탑의 기단부 구조 등으로 보아 석가모니 열반 직후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 당시 출토된 진본 사리병은 인도 파트나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아소카 왕이 이곳의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발굴해 전국에 분배하여 많은 탑을 세웠으므로 엄밀하게 이곳에 진신사리가 현재 봉안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리가 안치되었을 자리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던 거대한 스투파의 기단 흔적은 뚜렷하므로 석가모니의 근본8탑 중 하나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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