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피고의 재판(Animal Trial)>
한국에서 반려동물에 대한 생각과 처우가 과거와 많이 달라지면서 반려동물이 사람에 위해를 주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앞으로 계속 화두가 될 것으로 생각하지만 중세 유럽에서는 동물 재판이 다반사였다. 재판이라면 피고와 원고가 있어야하며 적어도 피고가 자신에게 씌여진 죄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야한다. 그러나 동물이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현대에 동물을 재판하지는 않는다. 현대 법정에서 사람만 소송 당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세유럽에서 동물을 재판정에 세우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동물이 말할 수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재판에 부의했다는 뜻이다.
<동물재판은 불법>
기록에 의한 유럽의 동물 재판(Animal Trial)은 9세기인 864년 독일의 보름스 의회에서 열렸다. 내용은 사람을 쏘아서 죽인 벌에 대한 형사재판이다. 독일 의회에서 곧바로 벌을 죽이지 않고 재판까지 벌였는데 판결은 벌의 둥지를 막아 질식시키라는 것이다. 현대로 보면 사람을 죽인 범인 벌을 찾아야하지만 범인 벌을 찾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다. 벌들이 떼죽음했음은 물론이다.
유럽에서 9세기 이후 공식적으로 진행된 동물 재판은 약 150〜200여 건이 되는데 대부분 프랑스에서 열렸다. 피고로는 돼지가 대부분인데 이는 중세 초기에 돼지 사육이 크게 번창했기 때문이다. 농촌에서만 아니라 도시에서도 돼지를 사육했다. 특히 돼지는 성안토니우스 보호 아래 있었으므로 도시 안에서 통행이 자유로웠고 이 때문에 사고가 종종 일어났다.
사실 동물 재판은 성경에 나올 정도로 매우 오래되었다. <출애굽기>에는 ‘황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 죽이면 그 황소는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되어있다.
11세기 베르나르드 주교가 프랑스의 성당에서 설교하는데 한 떼의 파리들이 윙윙거리며 설교를 방해하자 그는 그 자리에서 즉시 파리들을 파문시켰다. 다음 날 교회에서 죽은 파리떼를 삽으로 퍼낼 정도였다고 하는데 파문 받은 파리들이 밤 사이에 내린 매서운 한파로 모두 얼어 죽었다고 한다.
1131년, 프랑스의 필리프 황태자가 돼지 때문에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사람에게 치명상을 입힌 돼지는 살인죄를 적용했다.
그러나 이들을 동물 재판으로 볼 수 없다는 시각도 있으므로 동물 재판에 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1266년 훤트네이-오-로즈(Fontenay-aux-Roses)에서 돼지가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동물 재판은 계속되어 15세기 초에는 프랑스 노르망디, 일드프랑스(현 파리지역)로 파급되었고 부르고뉴, 로렌, 피카르디, 샴페인으로 퍼져나갔다. 동물 재판은 프랑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독일 등으로 수출되었고 놀랍게도 동물 재판은 18세기까지 계속되었다.
학자들에 따라 동물 재판은 당대의 법규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엄밀히 말하면 돼지를 포함한 동물들은 재판을 받지 않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중세시대의 근원이라 볼 수 있는 『로마법(Corpus Juris Civilis)』은 동물은 유죄일 수 없다고 적었다. 이성이 결여된데다 범죄 의도를 숨길 수 없으므로 범죄를 저지를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동물이 저지르는 모든 죄는 그 주인이나 그 동물을 돌보는 사람의 책임으로 인식했다. 예를 들어 돼지치기가 돼지를 통제할 수 없어 돼지가 누군가에게 해를 입힌 경우, 돼지가 아니라 돼지치기가 과실을 이유로 책임졌다.
그런데 돼지재판은 중세시대의 유럽에서 로마법이 공식적으로 적용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왕들은 자신의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로마법 준수를 강조했지만 지방 지배자들은 세속적인 법에 보다 신경을 기우렸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통치하는 지역의 주민들로부터 신망을 얻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대부분 지역에서 법령보다 관습이 우선이었다.
돼지 처형 등은 실무적인 문제도 일으켰다. 13세기 필립 드 보마누아르는 동물 재판을 보고 돼지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관행이 법적으로 터무니없다고 주장했다. 돼지 처형은 전적으로 법원에서 사건을 심리하는 당사자들을 부유하게 만들려는 목적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 가장 중요한 비평은 돼지처형으로 주인이 돼지고기도 갖지 못하고 처형경비 즉 소송 비용도 부담해야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피에르 아이롤 신부는 성당을 대변했다. 암퇘지를 처형함으로써 다른 암퇘지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부모가 자녀를 혼자 두지 않게 만드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동물 주인이 보다 동물 관리에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에스터 코헨 박사는 돼지에게 이성을 부여함으로써 인간 정의의 범위 안에 돼지를 포함시킬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살인과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자체는 인간과 동물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돼지를 ‘인간류’로 만들어 재판하고 공개적으로 처형함으로써 세상이 다시 한 번 안정될 수 있다는 뜻이다.
<동물 재판 유형>
동물 재판은 기본적으로 두 종류로 분류된다.
① 인간을 해친 개별 동물에 대한 세속적 소송
② 인간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를 훼손시킨 해충 등에 대한 소송.
동물 피고인들은 교회와 법원에 사례별로 출두했는데 이들에 대한 범죄는 살인에서 민사상 손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인간 증인은 법정에 출두했고 동물들은 교회 법정에 출두했는데 대체로 변호사가 변호했다. 유죄 판결을 받으면 동물을 추방하거나 처형했다.
1314년 프랑스 발루아에서 황소 한 마리가 사람을 죽였다. 황소는 지방 의회의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 당시의 죄목은 여러 가지인데 주로 동물들이 마법을 사용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았다.
그러므로 사형 언도를 받은 동물의 처형방법은 그야말로 다양하다. 화형⋅단두형⋅돌로 쳐죽이기는 물론 채찍질⋅불로 지지기⋅타르 칠하기⋅털 뽑기⋅주리 틀기⋅내장 꺼내기 등도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피고 돼지의 경우 재판과 처형 때 사람과 똑같이 옷을 입혔다.
14세기 안주인이 폭행을 당했는데도 저지하지 않고 보고만 있었다는 이유로 가축들을 포함한 집 전체가 처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379년 프랑스에서 돼지 사육자의 아들인 페리노 뮤에가 살해될 때 말리지 않고 바라보았다는 이유로 그 지역 모든 가축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모든 돼지에게 사형이 구형되자 윔베르 드 쁘티에 수도원장은 부르고뉴 대공에게 돼지들을 용서해달라고 간청했다. 돼지들은 주민들이 먹어야 할 양식이므로 모두 죽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부르고뉴 대공은 경제적 파국을 피하기 위해 가축들을 사면했다.
1386년, 팔레즈(Falaise)에서 벌어진 살인자 처형은 그야말로 유럽인들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당시 처형 장면을 그린 「거리의 유아들」이란 프레스코 그림은 당시에 벌어진 처형 절차를 상세하게 보여주었다. 처형 장면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나왔으며 죄수에게는 새 양복이 주어졌는데 광장에서 처형되는 범죄자는 돼지였다. 이 그림은 1820년 파손될 때까지 400년이나 교회의 벽면을 장식했다. 돼지는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는데 사전에 머리와 앞다리를 불구로 만들었다. 이는 당시에 사람들을 처형하는 방식으로 돼지도 같은 방식으로 처형된 것이다.
1394년, 프랑스에서 돼지에게 교수형을 처했는데 이유는 신성하게 봉헌된 과자를 먹었기 때문이다. 돼지가 인간과 함께 산다는 것은 이해해지만 신과 함께 위치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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