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왕과 원탁의 기사 성배(4)
<아서왕의 시신이 발견되다>
1190년 글래스톤베리의 수도승들이 다음과 같이 새겨진 납 십자가가 부착된 석판을 발견했다.
‘아발론 섬의 왕 아서가 여기에 잠들다.’
수도승들은 묘석 안에 있던 큰 관에서 큰 키의 남자 해골과 금발한 여자의 여자의 해골이 들어 있었다. 남자는 10여 군데 부상을 입었는데 특히 머리 부분은 둔중한 물건에 맞아 부서져 있었다.
아서왕의 묘가 발견되었다는 글래스톤베리는 아서왕의 왕비인 기네비아가 서머셋의 왕 멜위스에게 유괴되자 아서왕이 글래스톤베리를 포위해서 왕비를 구출했으며 나중에 이 땅에 매장되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대 수도원 안에는 당시에 수도원이 있었는데 그것은 색슨인이 글래스톤베리를 점령한 568년경에 이미 기독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10세기에는 학문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1180년경, 헨리 2세가 아서왕이 글래스톤베리에 매장돼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수도원장으로 하여금 조사케 했다. 그 결과 아서왕의 묘가 발견되었으며 그 후 글래스톤베리는 완전히 유럽에서 순례의 중심지가 되었고 대수도원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수도원이 되었다.
학자들에 따라 아서왕의 묘가 발견되었다는 것 자체를 수도원이 만들어낸 것으로 생각한다. 우선 납으로 된 십자가는 사라졌으나 1695년에 십자가를 그린 그림이 남아있는데 그림의 십자가에 적힌 글을 보면 그것은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아서왕이라든가 아발론 섬의 언급이 위조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당대의 수사들은 교회의 재건을 위해 성유물에 호기심을 보이는 지배자나 관광객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으로 재정을 채웠다. 중세시대에는 성 유물을 담보로 매매가 성행했고 영리한 수사들은 어디에나 있었으므로 글래스톤베리 수도원에서 교활한 사기를 쳤다고 추정한다. 그것은 한 마디로 수도원의 후원자인 당시의 영국왕 헨리 2세를 빈털터리로 만든 것으로도 알 수 있다.
1962년 고고학자 래리프 레드포드가 소위 왕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곳에서 누군가가 매장되었던 흔적을 찾았다. 그곳은 7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평석을 깐 무덤 두세 개의 잔재였다. 12세기 수도사들이 단순히 선대 수도사의 묘소를 발굴한 후 아서왕의 무덤이라고 주장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여하튼 이들이 아서왕 부부를 뜻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진위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문제의 글래스터베리는 19세기 후반에 성배로 다시 주목을 받았다. 존 굳차일드(John Goodchild)가 글래스턴베리 인근에 유리그릇을 숨겼는데 이를 웰슬리 튜터 폴(Wellesley Tudor Pole)이 1906년에 회수하여 이것이 진짜 성배라고 홍보했다. 그만큼 글래스턴베리의 성배가 유명하다는 뜻이다.
<역사로 들어온 아서왕>
중세사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는 아서왕 전설의 고민은 아서왕이 실존인물이냐이다. 특히 아서왕이 활약한 시대가 5〜6세기인데 아서왕이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무려 500년이 훨씬 넘는 1145년 제프리 오브 몬머서가 쓴 『브리튼왕의 역사』가 출간되면서이다.
중세 유럽은 그동안 아서왕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의 책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자 아서왕이 현실세계로 들어온 것이다. 사실 아시아에서 잘 알려진 조조, 유비, 손권의 삼국 이야기는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가 출간되고 나서 폭발적으로 회자되었는데 『삼국지연의』는 역사적인 사실보다 1000년 후의 일이다.
그러나 『삼국지연의』와 『브리튼왕의 역사』가 다른 것은 『삼국지연의』는 역사적인 사실을 기본으로 소설을 쓴 것이지만 『브리튼왕의 역사』의 아서왕 이야기는 가공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특히 아서왕이 기사도의 전형으로 나오는데 아서가 실제로 살아있을 5〜6세기라면 기사도와는 관련없음이 분명하다. 기사도 자체가 중세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역사는 바뀌기 마련이다. 근래 과학 분야가 획기적으로 발전하고 있는데 고고학 분야도 마찬가지인데 영국에서 그동안 전혀 실적이 없는 분야에서 그야말로 대박을 터트렸다. 바로 아서왕의 전설이 사실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서 왕의 생가를 발견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서의 궁전 가능성>
『브리튼왕의 역사』에서 아서는 영국 콘월 카운티의 틴타젤(Tintagel) 마을 바로 외곽의 바람이 많이 부는 해안 절벽의 성에서 태어났다고 적었다. 아서의 아버지 우더 펜드라곤이 콘월 공작의 아내 이그레인을 사랑하여 마법사 멀린에게 도움을 청했다. 멀린은 우더를 공작으로 변장시킨 후 이그레인과 하룻밤 동침토록했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아서라는 설명이다.
사실 이런 기술은 아서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로 제시되었다. 물론 830년에 지어진 영국 수도사 넨니우스(Nennius)가 <브리튼인의 역사>에서 아서를 보다 실용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에서 묘사했지만 마법사의 도움으로 공작 부인과 동침하여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소설에서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여하튼 아서가 살아 있었을 5세기 말 영국은 독일 고향인 앵글로 색슨 족이 영국의 절반을 차지했다. 그런데 490년대에 무언가가 바뀌었다. 영국군이 대규모 반격에 나서 앵글로색슨족을 동쪽으로 밀어냈는데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는 강력하고 통합된 영국 지도자가 출현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문제는 그 사람의 이름이 어떤 텍스트나 비문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철저한 자료 작성에 이력이 있는 로마인들의 자료가 부족하다는 것은 당대가 엄청난 혼란된 시기이므로 여러 면에서 자료가 멸실되었는 뜻이다.
학자들은 당대의 지도자가 알려져있지는 않지만 실재로 존재한다면 아서 이외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중부 브리튼의 슈루즈베리(Shrewsbury) 마을 근처에 있는 고대 로마 도시인 비로코니움(Viroconium)에서 5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가장 크고 가장 강력하게 방어된 도시였다는 증거가 발굴되었는데 여기에는 지도자의 궁전도 포함되었다.
현장을 방문한 학자들은 이들 시설이 앵글로색슨족을 격퇴하기 위해 영국군을 재편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영국을 침공하는 색슨족에 맞서 영국인의 수호자이자 구세주라는 이상화된 이미지는 아서로 통합되면서 중세시대를 이끌어가며 영국의 모든 왕과 군대의 지도자로 설명하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색슨과 12번의 전투에 참가하며 차차 그의 캐릭터에 차차 초자연적인 특성이 부여된다.
‘아서의 12번째 전투는 바돈의 언덕에서로 가장 가혹했다. 이 전투에서 940명이 그의 손에 의해 쓰러졌는데 신 외에 그에게 도움을 준 사람은 없었다.’
넨니우스는 아서가 참여한 전투가 12번이 되는데 이 정도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가 틴타젤에서 탄생했다는 것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몬머서의 이야기가 환상처럼 읽히지만 그것이 진실의 핵심에 기초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아서가 치명상을 입고 엑스칼리버를 호수에 던졌다는 것인데 학자들은 이 문제가 ‘참’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고대 영국인들은 물의 여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신성한 웅덩이와 호수에 칼을 던지는 것은 관습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아서가 신이 자신을 치료해달라는 뜻으로 칼을 던졌을 가능성도 높다는 해석이다. 당시에 부상자들이 취하는 일반적인 행동이라는 뜻이다.
멀린 이야기도 사실에 기초했을 개연성이 있다. 5세기에는 멀린과 같은 왕실 고문이 존재했다. 그들은 시인, 일부는 약용 식물에 대한 지식을 인정받은 무당으로 알려진다. 여기에는 유명한 ‘마법 버섯’과 같은 환각제도 포함된다. 아마도 무당에 의해 우더가 그녀의 남편이라고 믿게 만드는 물약을 이그레인에게 전해주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다.
여하튼 넨니우스의 이야기는 아서 왕의 전설 뒤에 역사적인 인물이 있음을 암시한다. 틴타젤 발굴 현장을 보면 이곳에서 현재 발견되는 건축물은 서기 500년경보다 약 600년이 늦은 12세기 초에 지어진 것이다. 오늘날 틴타젤의 절벽에서 볼 수 있는 험준한 회색돌 유적은 13세기에 지어진 성의 유적이다.
그런데 발굴이 진행될수록 상당히 연대가 높은 건축물의 기초들이 발견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출토된 토기, 도자기, 유리 등은 아서 왕이 살았던 바로 그 시대로 거슬러 간다는 것이다. 즉 아서 시대에 살았던 부유하고 중요한 인물의 거주지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학자들은 틴타젤에서의 발굴 유적을 볼 때 아서가 이곳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을 높게 꼽는다. 아직 아서 왕을 증명할 수 있는 명문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아서 왕이 실제로 존재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아졌다는 뜻이다.
<아서 유전자 찾기>
아서왕이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틴타셀 성의 발굴에 고무되어 그가 실존인물이라면 그의 DNA가 현대인에 있어야한다는 이론이 제기된다.
텍사스 휴스턴의 마이크 월쉬(Mike Walsh) 박사는 남성의 Y DNA 염색체 패턴을 약 400개의 조상 가족과 연결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는 서기 500년에서 1200년 사이의 사람들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들의 연계는 각 집단의 문장으로도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아서왕이 실존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인물로 상상했는데 아서왕의 전설은 사실적 상황을 토대로 아이디어를 얻었을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마이크 월쉬 박사는 아서왕의 이야기가 기원전 50년경에 로마가 프랑스 북부를 정복했을 때의 부족이야기라고 주장했다. 베네티라 불리는 선원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부족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전쟁으로 거의 전멸 당하자 아일랜드로 떠났는데 월쉬 박사는 그의 부족과 연결되는 DNA를 발견했다.
제프리 오브 몬머서와 연계되는 이야기는 로마가 퇴각하는 서기 410년을 가르키는데 이때 무명의 기독교 수도사가 ‘테오도시우스 대학(Cor Tewdws)'이라는 대학을 개설한다. 이곳에는 7개의 큰 홀, 400채가 넘는 집, 그리고 987년에 바이킹이 파괴하기 전까지 매년 2,200명 이상의 학생이 있었다고 한다. 각 홀에 켈트족들이 자신들의 부족을 표시하는 문장을 갖고 있는데 월쉬 박사는 500년경 테오도시우스 대학의 교장은 아서왕의 사촌인 성일투드(St. Illtud)라고 설명했다.
월쉬 박사는 베네티의 하위 부족과 성의 조합에 관한 DNA를 추적하여 아서 왕 의 역사적 배경을 찾아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400개 DNA 가족 그룹을 7개 왕국으로 분류했는데 이들은 모두 서기 500년 이전과 관련되는데 DNA 증거는 베네티 전사들이 영국 콘월 왕국과 데본 왕국의 다른 병사들과 함께 현재의 브르타뉴 지역으로 이주했음을 보여준다. DNA 분석에 따르면 아서는 두 왕국을 아우르는데 이것은 색슨족 침략을 피해 도망친 영국인의 흔적이다. 근간 보다 명확한 DNA 분석으로 아서의 가계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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