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왕과 원탁의 기사 성배(2)
<아서왕 원탁의 기사>
성배이야기는 중세 유럽의 영웅전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원탁의 기사 즉 아서왕의 이야기로 더욱 환상과 신비로움을 발휘한다. 사실 아서왕의 이야기 자체가 성배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탁의 기사」, 「엑스칼리버」, 「대마법사 멀린」 등 수많은 영화와 소설들이 그를 소재로 하여 만들어졌다. 그에 대한 전설을 다룬 영화, 소설, 애니메이션 등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는 것은 그만큼 매력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그동안 학자들은 아서왕이 정말로 실존한 인물인지 아닌지 조차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의 실존여부를 증명할 단서가 매우 빈약하므로 아서왕이 신화 속에서 존재하는 인물이라고 단언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아서가 실존인물일 수도 있지만 명백하게 이것이 아서왕의 확실한 증거라는 것이 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서왕은 1145년 제프리 오브 몬머서(Geoffrey of Monmouth)가 쓴 『브리튼왕의 역사, History of the Kings of Britain』가 출간되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아서왕에 대한 일반적인 전설은 다음과 같다.
‘아서 왕의 아버지 우더 펜드라곤은 영원불멸의 생명을 가진 고로이스 콘월 공작의 아내 이그레인을 사랑했다. 그녀를 갖기 위해 그는 마법사 멀린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는 우더를 공작으로 변장시킨 후 이그레인과 하룻밤 동침에 성공했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아서다.
아서는 멀린의 손에 맡겨져 성장했고 아서가 15세가 되는 해에 제국의 제후들을 방문했다. 한 예언가가 아서만이 전설의 섬 아발론에 꽂혀 있는 신비로운 칼 ‘엘스칼리버’를 뽑을 수 있다고 예언했는데 아서는 힘들이지 않고 칼을 뽑는다. 이 칼에는 ‘칼을 뽑는 사람이 영국의 진짜 왕이다’라는 글이 있었다. 물론 다른 전설에 따르면 호수에 살고 있던 요정이 그에게 엑스칼리버를 건네주었다고도 한다.
<신검 엑스칼리버>
아서왕을 가장 신비롭게 만드는 것은 성배(聖杯)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명검 엑스칼리버 역시 서양사의 한 축을 이룰 정도로 중요한 요소이다. 학자들은 엑스칼리버에 대한 신화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전설로부터 태어났다고 추정한다.
현재의 덴마크 지역에 주로 살고 있었던 앵글로 색슨 인에 의한 브리타니아 정복이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학자들은 색슨 족의 초기 침략은 450년경에 몇 차례의 현 영국의 침입에서 시작되었고 싸움은 단속적으로 100년 이상 계속되었다고 추정한다. 브리튼 인은 완강하게 싸웠지만 형세가 점점 불리해지자 일부 브리튼 인은 현 프랑스 영토인 갈리아로 달아나 해협 연변 지방에 자리 잡았다. 브레타뉴 반도라는 지명은 이 때문에 유래한다.
한편 브리튼 인의 주력은 잉글랜드 남서부에서 끝까지 항쟁에 성공하여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들 전투에서 지휘를 맡았던 사람이 바로 아서라는 인물이다. 이 전설이 과장되어 6세기 후에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라는 신선놀음과 같은 이야기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아서가 엑스칼리버를 뽑았기 때문에 왕이 된 것이 아니라 원탁을 정비했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전설에 의하면 우더왕은 귀네비어의 아버지 레오다간에게 원탁을 맡긴다. 원탁의 둥근 형태는 정치적으로 이상적 원시 공화제를 상징하지만 일반적으로 성배가 한가운데에 있는 여성의 순환 도형으로 간주한다. 원탁 주위에는 보통 50배수로 하는 숫자의 인원이 둘러앉는데 이 숫자는 고대 사회에서 여신을 섬기는 여사제의 숫자다.
콜린 윌슨이 적은 엑스칼리버를 둘러싼 아서 왕의 진상은 다음과 같다.
우선 아서 왕은 왕이 아니라 장군이었다. 더구나 그는 중세기 갑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다닌 왕은 아니었다. 이유는 아서는 로마인들이 브리튼에서 막 떠나던 무렵인 470년경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는 로마인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사용한 칼은 전설적인 엑스칼리버가 아니라 로마 단검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410년경 로마인들은 브리튼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게르만민족인 고트족의 로마 영토 진입과 훈족의 아틸라(Attila, 395〜453) 등으로부터 로마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브리튼은 보티게론이 지배했는데 북쪽의 스코틀랜드에서 온 픽트족과 분쟁이 생기자 색슨족 용병을 불렀다. 불행하게도 보티게론이 용병에게 줄 돈이 떨어지자 용병들은 브리튼을 정복하기로 결정하고 브리튼 원주민(겔트족)들을 공격했다.
이때 혜성과 같이 나타난 사람이 암브로시스 아우렐리우스(Ambrosius Aurelianus)로 겔트족을 규합하여 색슨 족을 공격했다. 그가 죽자 동생인 어터 펜드라곤이 뒤를 이었는데 이 때 가장 뛰어난 장군 중 하나가 아르토리우스라는 이름의 젊은이로 그가 바로 전설적인 아서 왕이다.
대부분 학자들은 아서 왕 시대에 켈트족의 영웅이 존재했다는 것은 거의 사실로 인정한다. 그 영웅은 영국에 살고 있는 앵글로색슨족과 싸워서 수많은 전과를 올린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아서 왕이 실제로 살아 있었다면 그는 영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중세시대의 화려한 기사복장을 하고 전투를 벌인다든가 혹은 궁전에서 거창한 마상시합을 한다는 것은 전혀 사실일수가 없다. 우선 시기가 맞지 않는다. 아서가 5〜6세기 인물이라면 당시 기사들은 코와 뺨을 보호하는 가죽과 철로 된 헬멧을 쓴 켈트족의 전사로 창과 나무방패를 사용했음이 틀림없다. 당대에 창은 칼보다 가격이 저렴했으므로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여하튼 마법의 칼 엑스칼리버를 가진 아서는 많은 전투에서 승리했고 영국과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에 살고 있는 그의 종족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아서는 색슨 족의 침략을 열두 번이나 막아냈는데 한 자료에 의하면 그는 프랑스를 포함하여 아일랜드, 노르웨이, 덴마크 등 유럽의 절반 가량을 정복했다고 한다.
12년 간의 전성기가 지속되었다. 그는 기네비아와 결혼해서 전설의 성 캐머롯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제국의 가장 고귀한 귀족 남자들의 모임인 원탁의 기사들을 소집했다. 그들의 주요 과제는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 사용한 성배의 행방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아서가 가장 사랑하는 원탁의 기사 랜스롯과 기네비아 왕비가 사랑에 빠져 둘이서 궁전을 탈출했다. 아서 왕은 그들을 프랑스까지 뒤쫓았다. 아서의 아들 또는 조카인 모드레드가 이틈을 이용해서 권력을 찬탈했다.
결과는 모두에게 불행을 갖다 주었다. 기네비아는 간통한 여자로 화형에 처해질 위기에서 랜스롯이 군대를 이끌고 그녀를 구했다. 아서와 랜스롯의 추종자 간에 알력이 결국 아서 시대를 몰락하게 했지만 다소 중재가 이루어졌다. 기네비아는 수도원으로 들어갔고 랜스롯은 일생동안 은둔자로서 지냈다.
반면에 아서와 모드레드는 화해없이 캄란 전투에 임했고 아서는 모드레드를 죽인다. 캄란 전투에서 아서도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데 아서는 사망하기 직전 베디비아 경에게 명하여 마법의 검 엑스캘리버를 호수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호수 속에서 손이 나와 검을 붙잡았다고 한다. 아서의 시신은 배를 타고 전설의 섬 아발론으로 떠났다.’
<예수의 성배의 전설>
아서왕을 가장 신비롭게 만드는 것은 성배(聖杯)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서왕 신화의 경우 신검 엑스칼리버가 큰 역할을 하지만 성배가 큰 중요성을 부여받는 것은 신검과 성배라는 깐깐한 조건이 아서왕의 전설과 결합되면서 신비스런 감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성배가 큰 중요성을 부여받는 것은 이룰 수 없는 이상, 순결, 미덕 등의 상징으로 간주되었고 대체로 마음이 순수한 사람만이 볼 수 있는 물건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제프리 몬머서는 아서가 어떻게 영국인을 이끌고 앵글로 색슨과 맞서 승리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가 신을 부르면서 엑스칼리버만으로 대적하는 사람마다 한 방에 죽이면서 470명이 쓰러질 때까지 앞으로 나갔다.’
이 설명은 그의 마지막 전투인 바돈 언덕에서 940명을 제압했다는 내용과 다름없는데 메간 딕케르손 박사는 아서와 성배가 연계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서가 전투에서 보인 초인적인 힘과 기술은 아서를 평범한 영웅 이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이러한 초자연적 특성만으로 아서를 영국인의 이상으로 만들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서에 관한 전설에서 기본은 모든 전투에서 그의 성공을 신의 도움으로 돌린다. 이는 당대에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사건이 신의 섭리에 의해 통제되므로 전투에서 승리는 신의 뜻이어야만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세의 영웅들은 신의 대리인 또는 신의 이름으로 싸웠는데 이는 신에 대한 헌신이야말로 훌륭한 전사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아서에게 신의 도움 즉 신이 선택한 전사 중 한 명이라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아서는 동정 마리아의 보호를 받았는 점이 그를 중세시대인 중에서 더욱 특별한 사람으로 부각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경건한 사람으로 성모 마리아가 묘사된 방패를 항상 들고 다니면서 그녀가 자신과 함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웨일즈 연대기』에는 아서가 3일 동안 예수를 상징하는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다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강력한 예수 즉 신으로부터 특별한 예시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메간 딕케르손 박사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잘못된 번역에 의했다고 설명한다.
‘어깨’라는 웨일스어 단어는 ‘이스퀴드(iscuid)’ 인데 ‘방패’라는 단어는 ‘이스퀴트(iscuit)’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서는 어깨에 십자가를 어깨에 맨 것이 아니라 방패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는 뜻이다.
여하튼 아서와 성모마리아와의 연계는 매우 중요한데 이는 아리마데 요셉이 갖고 왔다는 글래스턴베리의 성배의 전설과도 이어진다.
14세기에 쓰인 전설에는 아리마데 요셉과 성모마리아가 글래스턴베리에 도착하여 정착하여 성배를 보관했는데 아서가 글래스턴베리를 방문했다. 그런데 꿈에서 천사가 나타나 인근에 있는 성모 마리아의 암자로 가라고 말했다.
성모마리아의 암자 즉 예배당을 방문했을 때 아서는 성모 마리아와 그녀의 갓난아들 예수의 환상을 본다. 그곳에서 그는 성모마리아에 대한 헌신을 서약하고 그녀의 보호의 상징으로 성모 마리아로부터 수정 십자가를 받는다. 이후 아서가 십자가와 성모의 이미지를 모두 포함하는 방패를 갖고 다녔다고 한다.
아서왕에 나오는 성배이야기는 다소 이해되면서도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다.
일단 성배는 아리마대 요셉이 영국으로 진본 성배를 갖고 왔다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요셉이 죽은 후 그 성배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는데 아서가 엑스칼리버와 성배를 확보하여 진정한 지도자 반열에 올랐는데 어떤 연유인지 성배를 잃어버려 이를 찾는데 열중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내용은 아서가 성배를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서의 후견이라고 할 수 있는 마법사 멀린이 호수의 요정 비비안에 의해 갇혀 있을 때 아서왕의 신하인 거웨인(Gawain)을 만나 아서에게 성배를 찾아야한다는 말을 전하라고 했다.
아서가 기사들과 한자리에 있을 때 거웨인이 성배를 찾아야한다고 말하자 갑자기 큰 소리가 들리더니 밝고 환한 빛이 들어왔다. 방 안에 향기로운 냄새가 가득하더니 하얀 비단에 쌓인 성배가 나타났다. 모두 성배를 보았는데 성배는 이내 사라졌다. 이 장면을 담은 그림은 그 후 수많이 나타난다.
아서가 성배가 나타난 사실에 신에게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자 거웨인을 비롯하여 다른 기사들이 성배를 찾아 나서겠다고 했다. 문제는 이를 찾는 사람이 한정된다는 점이다. 성배를 보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기사도 정신을 비롯하여 완벽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배를 찾는 것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아는 아서이지만 그가 말린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니었고 다음날 기사들은 성배를 찾아 모험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서의 원탁의 기사의 숫자는 사람에 따라 다른데 최소 13명에서 300여 명이나 된다. 아서의 이야기가 흥미를 주는 것은 성배 찾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그들 나름대로의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는 점이다. 아서의 이야기가 남다른 생명력을 갖는 이유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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