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3대 성유물

예수의 3대 성유물(10)

Que sais 2021. 9. 4. 09:56

https://youtu.be/goMDeP_WytA

 

성배의 비밀 - 다빈치 코드

원문 https://nudge-story.tistory.com/53 https://nudge-story.tistory.com/54 https://nudge-story.tistory.com/55 https://nudge-story.tistory.com/56 참고문헌 : 「'아리아인의 성배'를 찾기 위한 Himmler의 비밀 탐구」, Graham Keeley, 오

youtu.be

『다빈치 코드』와 성배(4)

<카타르 파의 성배 구출>

카타리파와 교황청이 혈투를 벌이면서 확보하려한 성배가 어디에 있느냐가 궁극적인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어느 누구도 제시하지 못한다.

학자들은 성배가 안전한 산을 뜻하는 몽살바(Montsalvat)또는 카타르의 마지막 거점인 몽세귀르에 있었다고 추정한다. 학자들은 두 지명이 동일한 곳으로 추정한다. 카타르성의 보물을 대피시킨 후 보물이 보관된 장소에 혼동을 주기위해 두 이름을 거론했다는 것이다.

여하튼 카타르인들이 십자군의 포위기간 중 비밀리 성배안정한 장소로 옮기는데 성공했다는 것이 핵심인데 사실 그 정황이 확실한 것은 아니다.

첫째18척의 배를 싣고 프랑스를 떠난 기사단이 스코틀랜드에 도착했고 성배로슬린(Rosslyn) 성당에 안치되었다는 것이다. 알려지기로는 1307 프랑스의 필립 페어 왕이 성배와 보물을 찾기 위해 공격하자 라로셀(La Rochelle)로 불리는 기사단 전초기지에서 제라르 드 필레르(Gerard de Villers)가 지휘하는 18척의 배로 영국으로 향했는데 목적지는 실제로 스코틀랜드의 로슬린이라는 것이다. 다빈치 코드에서 로슬린 성당이 나오는 근거다.

카타르파가 십자군의 공격을 피하여 성배를 옮겼다는 스코틀랜드 로슬린 성당은 성배에 관한 한 매우 유명한 곳이다. 15세기에 건설된 작은 예배당이지만 과거부터 신비주의자들의 온상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이는 잘 알려진 템플기사단,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와 연결되는데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이들과 관련된 예배당 내부가 북유럽 이교도, 기독교, 기사단의 이미지가 물씬한 유물들이 함께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로슬린 대성당

이들이 갖고 온 수많은 보물을 로슬린 성당 제단 지하에 보관했는데 그 보물 중 핵심이 성배. 그러나 그것에 어떤 손상을 주기만해도 불행이 올지 모르므로 그대로 두고 있다는 설명인데 근래 성당 내부에 있는 두 개의 기둥 중앙에 금속 물체가 금속탐지기에 의해 포착되었지만 그것이 성배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댄 브라운의 소설 다 빈치 코드영화화한 다 빈치 코드의 상당 부분을 이곳에서 촬영했다. 영화의 제작진들이 다 빈치 코드의 촬영장으로 요청하자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거절했지만 링컨 대성당은 수락했다. 결국 촬영이 허락되어 4일 동안 250명의 스태프, 감독, 할리우드의 톰 행크스와 오드리 토투가 촬영했는데 다 빈치 코드가 성배를 주제로 하므로 가장 유력한 성배 보관지 중 하나인 로슬린을 특별히 선택했다는 후문이다.

 

<비극의 현장 몽세귀르성>

몽세귀르성카타르와 교황청 십자군과의 혈투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이들 모두 기독교로 똘똘 뭉친 집단이다. 그런데 이들이 십자군 전쟁 때 그야말로 혈투를 벌였는데 그 중에서도 몽세귀르의 혈투는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스라엘의 마사다 성과 유사한 순교의 현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1244 카톨릭 십자군과 10개월 간의 포위 공격 끝에 함락된 카타르의 마지막 요새로 이곳에서 끝까지 항쟁한 약 225명의 카타르인들이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산 채로 화형을 당했던 장소이기하다.

천혜의 요새인 몽세귀르 지역에 인간이 정착한 최초의 흔적은 약 80,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로마인들이 이런 장소를 그냥 둘 리 만무이다. 로마 화폐와 도구를 포함한 로마 점령의 증거가 유적지 주변에서 발견되는데 몽세귀르(Montségur)안전한 언덕을 의미한다.

중세 시대에 몽세구르 지역툴루즈 백작, 카르카손 자작, 푸아 백작이 통치했다. 1204년 영주인 레이몬 드 페레이(Raymond de Péreille)40년 이상 폐허가 된 성을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교황청에서 카타르파에 대한 공격이 심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재건된 몽세귀르 성은 천혜의 방어지를 배경으로 가톨릭 십자군의 약탈로부터 피난처를 찾는 카타르 가족들의 피난처카타라파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는 카타르의 주교가 이곳에 상주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들의 예상대로 교황청의 십자군은 4차례에 걸쳐 포위 공격했다. 1212시몽 4세 드 몽포르의 동생 기 드 몽포르가 이끄는 첫 번째 작전은 실패했고, 1213시몽 4세 드 몽포르가 직접 이끄는 두 번째 작전도 실패했다.

두 번의 공격에도 실패하자 1215, 교황청은 몽세귀르를 이단의 소굴로 선언했는데 놀랍게도 몽세귀르성의 인원은 보다 많이 증가하여 500여 명이나 되었다. 몽세귀르에 근거지를 차린 카타르 파는 십자군에 대항하여 수시로 게릴라전을 벌렸다.

몽세귀르가 카타르의 중심으로 부상하자 교황청이 악마의 소굴 소탕을 명했음에도 1241년에 벌린 3차 공격에도 실패했다. 그런데 프랑스 왕에게 심각한 악재가 터진다. 잉글랜드 왕 헨리 3,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스페인의 아라곤의 왕, 카타리파의 툴루즈 백작, 푸아 백작, 몰락당한 카르카손 자작 등이 연합하여 프랑스왕 축출을 계획한 것이다. 그 핵심이 툴루즈, 카르카손 등인데 이들은 50여 명의 카타리파를 동원하여 아비뇽에서 두 명의 종교 재판관과 수행원도 살해했다. 결론은 이들 연합했음에도 프랑스 왕을 축출하는데 실패하여 프랑스왕이 몽세귀르 성을 반드시 함락시켜야 한다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특히 교황청1243년 해방된 카타르지역 베지에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카타리즘의 보루인 몽세귀르 성을 반드시 함락하여 파괴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12435월 드디어 교황청과 프랑스왕연합하여 몽세귀르 성 점령을 위해 출정했다. 동원 장병10,000이었는데 이들과 맞서야 할 카타르 병사는 200여명이다. 당시 몽세귀르 성에는 500여 명이 있었지만 이중 300여 명은 여성, 어린이를 포함한 비전투원이다.

십자군 공격군은 몽세귀르성이 천혜의 절벽 위에 있으므로 물과 보급품의 고갈에 역점을 두었다. 이런 전략은 십자군이 카타르를 공격할 때 기본적으로 사용한 방법으로 당대의 철통 방어로 유명한 카르카손도 이 전술에 의해 함락되었다.

그러나 몽세귀르는 만만치 않았다. 천혜의 요새인데다 10,000명이 넘는 포위군이 있음에도 지역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공격군이 포위했음에도 몇 달 동안 수비수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고 심지어 증원군이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여름과 가을 내내 포위가 실패하자 포위로만 몽세귀르 성을 함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 프랑스 십자군은 성을 직접 공격하기로 했다. 문제는 몽세귀르 성이 거대한 석회암 바위 위에 잘 보호되어 있다는 점을 역이용하여 프랑스 십자군은 카타르의 허를 찌르는 작전을 벌였다. 야밤에 정상 동쪽의 절벽을 통해 진입한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동쪽 절벽은 등정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므로 카타르 수비군은 이곳에 감시 초소조차 설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십자군은 등산에 능한 피레네 산맥의 바스크 용병들을 투입하여 록 드 라 투르(Roc de la Tour)로 알려진 지점에 전초기지를 설치하고 장병들과 무기를 운반했다.

더불어 십자군투석기를 건설하여 성을 공격했다. 몽세귀르에서는 투석기 파괴에 특공대를 투입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더불어 반란자도 생겨 일부 성 부분이 점령되자 전세는 확연히 기울어졌다. 결국 몽세귀르 성에서 항전하던 레이몽 드 페레이 성주는 프랑스 공격군 대장인 기 드 레비(Guy de Lévis)항복 협상을 벌였다.

 

몽세귀르성

2주간의 휴전 기간 동안 항복협상을 벌였고 1244316, 항복으로 결정되었는데 중요한 것은 이 기간 동안에 몽세귀르의 34명의 카타르인들이 성벽을 타고 탈출하면서 카타르의 보물을 옮겼는데 이 보물 중에 성배가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항복 전후에 따른 정황은 잘 알려져 있다. 그들에게 제시된 휴전조건은 다른 지역과는 비교적 매우 관대했다. 종교재판에서 자신들이 견지한 신앙을 부인하고 죄를 고백하는 사람모두 사면한다는 것이다.

몽세귀르의 카타르인들은 휴전 2주 동안 기도와 금식으로 보냈다. 500여 명 중 카톨릭으로 전향한 사람들을 모두 자유롭게 성을 떠날 수 있었다. 항복 조건에 따라 아비뇽에서 종교재판관을 살해한 사람들도 자유롭게 방면되었고 성주인 레이몬 드 페레이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225은 십자군에 전향하지 않고 신념을 지키면서 모두 화형에 처해졌다. 이것은 몽세귀르 성에 카타르파 신자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만큼 중요한 물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배라는 것이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그야말로 감동적이다.

 

‘1344316, 그들은 성을 떠나 장작더미가 쌓인 들판으로 내려갔다. 개별 말뚝에 희생자가 너무 많아 내부에 장작더미를 쌓아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불길에서 다음 불길로 직접 옮겨가며 장작더미에 올라가 죽었다. 희생자들 중 귀족들은 모두 혈연 관계였다. 그들은 할머니, 어머니 및 딸의 3대 가족을 포함했는데 기쁨의 찬송을 부르고 신에게 감사를 드렸다.’

 

몽세귀르 성의 함락으로 카타르파의 세력은 급격히 위축되었고 상당수 핵심들은 스페인의 아라공, 이탈리아 북부 지역으로 피신했다. 교황청 십자군은 몽세귀르성을 점령한 후 건물들을 모두 파괴하고 새로운 성을 건설했다.

몽세귀르의 비극은 여러 곳에서 기억된다.

1244316일 몽세귀르 성에서 225 이 자진하여 카타르 신념을 버리지 않고 화형 당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인들이 로마인과 대적하여 마사다에서 모두 자살한 것과 마찬가지로 후대에 큰 감동을 주었다. 수많은 그림과 조각 등이 제작되었고 몽세귀르 1244라는 스토리게임으로도 등장한다. 몽세귀르성1862년부터 프랑스의 기념물 유적, 1989고고학 유적과 방어선으로 지정되었다.

성배가 몽세귀르 성에 도착한 연유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이곳 성배아리마데 요셉, 아서왕, <시온수도회> 및 템플기사단 등과도 연계된다. 이들 수호단은 십자군 전쟁 때인 1120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에 본부를 두고 예수의 성유물을 중점적으로 추적했고 이때 진실한 성배를 발견했고 솔로몬의 보물과 함께 유럽으로 갖고와 카타르파의 근거지에 보관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카타르파와 십자군과 전투 여파로 현재 알려지지 않은 장소 즉 프랑스, 영국 등 비밀 장소에 숨겼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후 나치 독일의 몽세귀르성 발굴 및 세계를 놀라게 만든 수많은 성배 찾기의 근원이라 볼 수 있는데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 로 이 내용이 다빈치 코드, 인디아나존스의 주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카타르파>

다빈치 코드에 시종일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의 작품이 핵심 요소로 등장하는데 도대체 성배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어떠한 관련이 있느냐고 질문하기 십상이다.

그가 등장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 중 한 명이라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과학기술, 공학, 해부학, 회화 및 조각 등 예술 분야에 다재다능한 재능을 보였는데 그가 사실은 로마 가톨릭에 의해 이단(異端) 선고를 받은 카타리파신자라는 것이다.

스페인 작가 하비에르 시에라다빈치를 이단자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최후의 만찬그림에서 여러 가지 증거가 발견된다고 주장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은 몇 가지 중세시대에 맞지 않는 특이성을 갖고 있다.

우선 예수와 제자들 뒤편에 일체의 후광(後光)을 그리지 않은 최초의 그림이다.

이는 카타르파예수를 인간으로 여겼다는 증거라는 설명이다. 또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창시자인 성 베드로가 손에 단도를 들고 다른 사도들을 위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다빈치 초대 교황이 배신자라는 모독적인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는 주장이다.

더구나 컴퓨터로 유다의 얼굴을 변용하면, 영락없는 다빈치의 초상화가 나온다. 또한 최후의 만찬에 잘 알려진 성배가 보이지 않으며 예수 옆에 있는 금발의 사도는 요한으로 알려지지만 요한보다는 여자처럼 보이는데 바로 막달라 마리아라는 주장이다.

바위 산의 성모마리아는 처음 공개될 때부터 교회에 충격을 주었다. 마돈나가 보이지 않는 머리를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등 논란의 대상이 되자 다 빈치는 다른 버전을 그렸다고 알려지는데 원본은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런던 국립박물관다빈치의 500주기 전시에서 원본을 공개했다. 박물관 측은 레오나르도가 왜 첫 번째 구도를 포기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지만 다빈치의 대표작 중 하나인 바위산의 성모가 원래 다른 구도로 그려졌었다는 그동안의 주장을 입증한다.

여하튼 다빈치바위산의 성모구도가 다르게 두 번 그렸는데 1483년 쯤 그린 최초 작품프랑스 루브르 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반면에 런던에서 발견된 새로운 밑그림1495년에서 1508년 사이에 완성됐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중세신학 담당인 길리안 에반스 교수카타르파는 다빈치 탄생 200여 년 전에 모두 사라졌다소설과 역사를 혼동할 일은 아니라고 잘라서 말했다.

그러나 다빈치 시대에 카타르파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교황청의 부패가 극심해지자 새로 일어난 신교의 교리에는 카타리파가 주장한 내용들이 많기 때문이다.

참고적으로 다빈치1492년부터 1498년까지 그의 걸작인 최후의 만찬을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식당 벽에 그렸다. 예수가 사도들 중 한 사람이 곧 자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말씀하는 극적인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니콜라스 프라멜 묘비

놀라운 것은 1975년에 파리에서 몇몇 양피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는 시원수도회의 중요 인물 명단이 적혀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그야말로 세계사에 매우 잘 알려진 사람이다.

 

13981418: 그랜드마스터, 연금술사 니콜라스 프라멜(Nicolas Flamel)

14831510: 그랜드마스터,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

15101519: 그랜드마스터, 레오나르도 다빈치

16541691: 그랜드마스터, 근대 과학적 방법의 창시자로 알려진 로버트 보일.

16971727: 그랜드마스터, 아이작 뉴턴

18441885: 그랜드마스터, 빅토르 위고

 

이들은 그랜드마스터(PRIEURE DE SION-LES NAUTONIERS)로 알려지는데 이들의 명단에 나타난 사람만 25명이나 된다. 니콜라스 프라멜은 연금술사로 가장 성공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영화 해리포터에서 학교장으로도 나온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이곳에 이름이 들어있는데 이들이 이라면 시온수도회는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로 이어져왔음을 알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최후의 만찬에 국한한다면 그는 당대의 회화법인 석고에 수성 페인트를 바르는 프레스코 기법이 아니라 벽에 여러 겹으로 페인트를 칠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가 프레스코 기법은 석고를 칠한 후 마르기 전에 그려야하므로 그림 작업이 느린 그에게는 작품을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결과, 걸작은 일생 동안 퇴화가 심해져 광범위한 복원을 계속 거쳐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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