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3대 성유물

예수의 3대 성유물(11)

Que sais 2021. 9. 4. 13:14

https://youtu.be/xJPVD6q_B9Q

 

성배의 비밀 - 오토란(Otto Rahn)

원문 https://nudge-story.tistory.com/57 https://nudge-story.tistory.com/58 https://nudge-story.tistory.com/59 참고문헌 : 「'아리아인의 성배'를 찾기 위한 Himmler의 비밀 탐구」, Graham Keeley, 오토란메모리알, 2007.02.06. 「

youtu.be

나치 교과서가 된 성배 탐험(1)

<3제국의 성배 탐사>

19042, 독일 남부 미셸슈타트에서 태어난 오토 란(Otto Rahn, 19041939)은 현대 성배 탐사의 아버지나 마찬가지로 인식된다. 그의 아버지 은 마을에서 마을로 옮겨가는 치안판사였기 때문에 오토란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보다는 역사책에 심취했다.

그런데 그는 중등학교 시절부터 중세 이단으로 불려 철저하게 프랑스 왕과 교항으로부터 탄압을 받은 카타르의 역사, 카타르파의 신앙과 반란에 매료되었다. 특히 그는 잃어버린 성배를 다룬 아서 왕의 파르시발(Parzival), 로엔그린, 니벨룽겐 이야기에 매료되었는데 파르시발이 거룩한 산인 몽살바(Montsalvat)성배가 은폐되어 있다고 지적한 것에 주목했다. 그는 이를 보다 파헤치기 위해 1922년부터 1926년까지 기센대학교에서 법학, 독일 철학 및 문헌학(언어 과학), 역사를 공부했다.

 

하인리히 슐리만

오토가 심취한 것은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트로이 발견이다. 그는 호머의 일리아드가 실제 역사적 사건을 반영했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출발하여 결국 트로이의 폐허를 발견했다.

오토란크레티앙 드 트로이가 퍼시발(Percival)에서 미완성으로 남겨둔 성배 이야기가 사실적 근거가 있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철저하게 성배에 대한 자료를 추전한 결과 그는 카타르 파가 성배소유하고 있다고 믿었다.

성배가 특별한 것은 당연하다. 성배소유하거나 성배와 접촉한 사람영생을 얻으며 질병이 치유된다는 것이다. 오토란교황청의 십자군과 카타르몽세귀르 요새에서 마지막 혈투를 벌였을 때 성배가 어딘가로 사라졌다고 믿었다.

그가 착안한 것은 중세 카타르의 행동고대 드루이드(Druids) 풍습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관찰하고 그들의 비밀 지혜가 중세 유럽의 음유시인인 트루바두르에 의해 보존되었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교황청과 카타르파와의 전쟁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빛과 어둠의 세력 사이의 투쟁이라는 것이다.

여하튼 오토란은 보다 심층적인 연구를 위해 1929년 프랑스를 방문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그는 신비한 백작부인 미리암 드 푸욜-무라(Miriam de Pujol-Murat)를 만난다. 백작부인은 어린 오토의 친구이자 후원자가 되었고, 오토가 랑그독을 처음 여행하는 동안 그녀의 개인 도서관과 차와 운전사를 이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녀의 지원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여 그는 카타르의 주요 인물들과 접촉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때문에 랑구독루씰론 지역몽세귀르 등 모든 지역이 그에게 호감인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오토란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3년을 카타르 지역에서 체류했다.

학자들은 이 당시 그의 생활에 주목했다. 그는 카타르 지역을 광범위하게 여행하고 수백 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흥미롭게도 이 기간 동안 그의 수입이 전혀 없는데도 많은 사람들 대동한다는 것이다. 그의 가족은 독일의 중산층이므로 오토란이 프랑스에서 살아가는 경비를 마음껏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어떤 비공개 조직이나 개인 후원자의 급여를 받고 있었음에 틀림없다는 결론이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네오 카타르 운동에 침투하여 신생 나치를 지원하는 비밀 요원으로 프랑스 남부에 파견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여하튼 오토란우사--벵 마을의 좁은 계곡에 주목했다. 이 지역은 유럽에서 가장 큰 석회암 지역 중 하나로 주변 산 전체가 벌집과 같은 동굴인데 그는 이곳을 동굴탐험은 근거지로 삼았다. 그는 지역 관광부 장관으로 신 카타르파의 대표안토닌 가달(Antonin Gadal)과 접촉했다. 그는 오토란에게 인근 유사(Ussat) 동굴들이 중세 카타르 신앙에서 중요한 초기 역할을 했으므로 성배 등 보물을 이곳에 숨겼을 것으로 믿었다.

 

오토란의 동굴탐험

그동안 그는 소소한 유물동굴에 보관된 커다란 운석을 발견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카바 신전검은 돌에 비견된다고도 전해지는데 녹슬거나 변색되지 않으며 흔들면 표면이 99% 순철인 밝은 붉은색 철 용액흘러내며마법의 치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운석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가달이 네덜란드로 옮겨 현재 암스테르담 사원의 제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오토란이 나름대로 성배 발굴에 진전을 보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오토란은 많은 사진을 찍었는데 동굴 벽을 따라 발견되는 낙서에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카타르와 템플기사단이 이곳 은신처를 공유했으며 현대 프리메이슨과 연계된다고 믿었다.

그들은 바로 시온수도회와 카타르 기사단이라고 단언했다. 오토란은 성배에 대해 적은 다음과 같은 자료에 주목했다.

 

‘1244년 프랑스 기사단이 예루살렘에서 성배를 확보한 몽살바의 카타르 기사단을 공격했다. 카타르Cathars) 기사단은 몽살바 성이 함락되기 직전 34명의 기사단원이 비밀 통로를 통해 성배를 갖고 절벽 밑으로 내려가 탈출했다. 이때 그들은 메로빙거 왕 다고베르트 2세의 마법의 의복과 예수의 성배를 갖고 갔다.’

 

그의 결론은 아리마데 요셉성배를 유럽으로 가져갔는데 13세기 말에 크게 번성했던 종교개혁운동카타르파궤멸된 후 성배가 사라졌다고 알려졌지만 수많은 자료들을 검토한 결과 프랑스 피레네 산맥의 몽살바성에 보관되어 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몽살바성이 어디에 있느냐이다.

그는 랑구독 지역을 탐문하여 몽살바가 랑구독 지역에 건재하는 몽세귀르(Montsegur)라고 결론지었다. 몽세귀르의 배치, 일출 방향 및 여러 신성한 장소와의 연계를 볼 때 성배와 같은 보물이라면 당연히 이런 곳에 숨겨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사람이 몽세귀르의 위치를 위장하기 위해 몽살바로 적었다는 것이다.

 

롬브리브 동굴

그는 1931몽세귀르 성을 직접 찾았고 몽세귀르 남쪽의 사바르테(Sabarthes) 동굴, 특히 유럽에서 가장 넓어 지역 사람들이 대성당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롬브리브(Lombrives) 동굴을 탐험하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무너져 내린 가파른 길은 롬브리브 대성당의 거대한 현관으로 이어지며, 흰색 석회암 석순 사이, 짙은 갈색 벽과 빛나는 암석 결정 사이에서 길은 산 속으로 이어진다. 높이 260피트의 홀은 이단자들을 위한 대성당으로 사용되었다. 몽세구르의 성벽이 아직 서 있던 동안 카타르는 성배를 그곳에 보관했다. 그러나 루시퍼 군대가 몽세귀르를 포위하여 위험에 처했다.’

 

여기에서 루시퍼 군대란 그들 카타르파와 맞서는 교황청 십자군을 말한다.

1932오토란황급히 이곳을 떠나는데 그가 소소한 보물을 발견한 것이 법적 소송에 걸릴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그는 파리를 거쳐 독일로 돌아왔고 1933년 그의 첫 번째 책인 성배를 반대한 십자군, Crusade Against Grail을 출간했다. 그의 카타르 박해에 대한 설명은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오토란에게 행운도 따랐다. 그가 랑구독루씰론지역에서 성배 탐사에 전념하는 동안 전 오스트리아 육군 대령인 빌리구트 베이스토(Wiligut-Weistor)를 만났다.

빌리구트 베이스토(Wiligut-Weistor)는 가문의 전통에 따라 그는 14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에 입대하여 1차 세계대전 때 훈장을 받으면서 40년 동안 충실한 군 복무를 했다. 퇴역한 후 게르만 역사에 심취되었다.

 

오토란의 책

이 당시 나치 독일의 실권자인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Himmler)는 자신이 작센 왕국의 하인리히 왕의 환생이라는 확신을 갖고 일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히믈러예수가 실제로는 아리아 혈통의 후손이라는 가정을 앞세웠다는 점이다.

이런 가설은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둘째 아들야곱아리아 혈통이며 예수를 포함한 후손들이 아리아인이라는 것에 기초한다. 한마디로 예수최후의 만찬에 사용한 성배아리아인이 가질 자격과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히믈러의 이런 계획을 추진하는데 알맞은 사람이 베이스토였다. 베이스토Thor현명한 전사라는 가명으로 SS에 정식으로 입단하여 새로 창설된 문화관련 SS 부서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대중 역사가들은 그를 히믈러의 라스푸틴이라고 불렀는데 그가 히믈러에 큰 영향을 미였음은 물론이다. 그 증거로 그가 전역 오스트리아 대령 계급에서 SS-준장 계급으로 승진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베이스토히믈러에게 오토란예수의 성배, 솔로몬 성전의 보물, 언약궤 등의 전문가라고 설명했다. 베이스토의 말을 들은 SS 친위대의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Himmler)는 즉각 오토란을 발탁했다. 그는 오토란이 찾고 있는 성배를 안치할 성을 독일에 이미 건설했으니 성배를 꼭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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