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3대 성유물

예수의 3대 성유물(13)

Que sais 2021. 9. 4. 13:16

https://youtu.be/xJPVD6q_B9Q

 

성배의 비밀 - 오토란(Otto Rahn)

원문 https://nudge-story.tistory.com/57 https://nudge-story.tistory.com/58 https://nudge-story.tistory.com/59 참고문헌 : 「'아리아인의 성배'를 찾기 위한 Himmler의 비밀 탐구」, Graham Keeley, 오토란메모리알, 2007.02.06. 「

youtu.be

나치 교과서가 된 성배 탐험(3)

<나치를 반대하는 SS대원>

문제는 오토란이 독일 아리안에 대한 결정적인 이론을 제기하기는 했지만 그는 철저한 나치도 아니고 SS 대원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오로지 성배찾기에만 전념하는 고고학자였다.

그런데 히믈러는 성배찻기에만 몰두하는 오토란1935년 설립된 생명의 원천이라는 뜻을 지닌 레벤스보른(Lebensborn)에 강제로 참여토록 했다. 레벤스보른인종적으로 순수한아리안 여성이 우수한 친위대원의 아이를 낳는 프로그램으로 이곳에서는 파란 눈, 금발 머리, 큰 체격 등 특징을 가진 순수 혈통의 아리아인을 키워내는 인종 실험장이다.

 

아리안지상주의 레벤스보른

그런데 나치의 핵심 조직무장친위대 장교아리아인 여성들 사이에서 강제로 낳은 아이들은 물론 점령 국가에서 납치한 아이들도 이 프로젝트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납치된 아이들은 정통 아리아인이 아니지만 이들이 독일화를 위해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사실 레벤스보른은 나치의 극단적 민족주의를 여실히 드러낸다. 나치레벤스보른에 들어갈 아이들을 대상으로 인종 검사를 했다. 나치가 정한 순수 아리아인 특징에 부합하는 1·2등급 아이들은 히믈러가 직접 운영하는 레벤스보른 프로젝트 시설로 넘겨진다. 3·4등급으로 분류된 아이들은 나치 독일이 만든 재교육수용소로 이송된다.

레벤스보른 아이들의 받는 생활은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은 엄격한 감시와 규율로 점철되는데 이불에 오줌 싸기, 방귀 뀌기, 손톱 물어뜯기, 자위 등은 금지 사항이다. 이런 일탈된 행위를 한 아이들은 강제교육수용소로 끌려가 학대당하거나 노예 노동에 시달렸다. 이런 스파르타식 생활 규제는 우수 인종을 이끌 강인하고 무자비한 미래 지도자들을 키우기 위해 필수적이라는 설명이다.

오토란은 성배찾기에서 소위 보직이 변경된 것인데 학자들은 히믈러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그의 개인 생활이 SS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19379오토란불명예스러운 행동을 자행한 칼 마러(Karl Mahler)의 징계 청문회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았다.

칼 마러는 히믈러가 지휘하는 SS의 독단적인 행동으로는 독일의 명예를 높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는 동성애 혐의도 받았는데 오토란도 함께 재판에 넘겨진 것이다.

오늘날까지 오토란이 어떤 명목으로 재판에 관련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에 대한 평결은 오토란2년 동안 술을 마시지 않아야하며 직위를 박탈당하고 다카우(Dachau)에 있는 강제 수용소에서 경비 임무를 맡는 것이다.

이 문제는 SS의 분신이라 볼 수 있는 히믈러와 나치의 성향과도 관련이 있다. 한마디로 동성애는 나치가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되는 엄청난 중범죄였다.

 

다카우수용소의 동성애쟈 수감(분홍색 마크 착용)

히믈러1937, 북서부 유럽의 늪지에서 발견된 시체가 동성애자의 근절을 위해 범죄자를 처형하여 습지에 묻는 철기 시대의 전통으로 살해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는 남성 동성애전염될 수 있고 그것을 방지하기 않으면 동성애가 SS 및 기타 남성 결속 공간 내에서 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북구에서 발견된 증거를 통해 동성애자를 근절해야한다고 강조하였다. 이후 2차 세계대전까지 약 15,000에 달하는 독일인 게이들이 집단 수용소에 감금되어 최대 60%가 사망했다고 알려진다.

히믈러가 동성애자를 극히 싫어하는데 놀랍게도 오토란동성애의 혐의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의 몇몇 동료들은 그가 분명 동성애자였다고 증언했는데 SS 단원으로 동성애자라는 것은 치명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오토란에게 명령된 다카우 수용소는 나치가 집권하고서 얼마 되지 않은 19336월 독일 최초로 정치범 수용을 위한 최초의 강제 수용소로 개설된 곳이다. 시간이 갈수록 악명이 높아져 자꾸 까불면 다카우로 보내 버린다라는 말이 통용될 정도였다.

이 수용소는 주로 유대인, 동성애자, 공산주의자, 집시, 사제, 반체제주의자들을 수용하는 곳으로 나치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홀로코스트의 산실이기도 하다. 다카우 강제 수용소는 뒤이은 다른 강제 수용소들의 원형이 되었으며 30개국 이상 20만 명의 죄수들이 다카우에 수감되었다고 알려진다. 그중 1/3 이상은 유대인으로 여러 가지 이유로 약 25,600여명이 사망했고 보조수용소에서도 거의 1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다카우수용소 해방

그러나 오토란은 그후 일어난 다카우 수용소에서의 나치 만행과는 관련이 없다. 다카우 수용소에서 유대인 대량 학살 등 본격적인 악마적 프로그램이 시행된 것은 그가 수용소를 떠난 193811월부터 시행된 것이다.

오토란의 성배 연구는 큰 틀에서 히틀러, 히믈러의 원대한 생각과 맞물려 있다. 즉 독일인이 남다른 민족이라는 것이다. 당대 많은 독일인들이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문제는 오토란이 나치 기준으로 볼 때 여러모로 불순분자에 가까운 인물이라는 점이다. 한마디로 SS의 중추부에서 연구하면서 나치의 실상을 알아차리자 사적인 자리에서 불만을 표하거나 반나치 언행을 표출하는 등 독일의 정책에 반대한다는 점이다. 임박한 전쟁에 대한 반대는 반역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히믈러의 강력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성배 찾기에 결국 실패했다는 것은 그에게 큰 하자가 아닐 수 없다.

하워드 부크너 박사오토란전쟁에 반대하고 대신 독일과 유럽이 카타르시스로 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독일이 1938년에 준비하고 있던 전쟁에 반대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상부에 보고했다고 지적했다.

 

전쟁 대신 독일과 유럽이 하나의 공동체로 변모해야 한다. 카타르의 역사를 심층적으로 연구한 결과 교회와 프랑스 왕좌의 부당한 박해가 카타르 파를 만들었다. 유럽의 국가들과 다른 모든 국가들이 세계 평화의 이익을 위해 카타르파와 같은 생각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나치 정권에 반대한 오토란

.

오토란은 히믈러의 개인 부관인 칼 볼프에게 반복해서 편지를 보내 자신의 세 번째 책을 완성하기 위해 자신의 직무를 면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나는 내 조국에 많은 슬픔을 가지고 있다. 14일 전에 나는 뮌헨에 있었으며 2일 후 산에 가기를 원한다. 나는 더 이상 내 조국에서 살 수 없다. 뮌헨으로 돌아오면서 모든 것이 나에게 돌아왔다. 내가 목격한 사건들. 나는 더 이상 잠을 잘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이때 오토란은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는데 당대 막강한 나치의 실권자이자 후원자인 히믈러에게 SS를 탈퇴하겠다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친위대는 개인 의사로 탈퇴할 수 없는 특수 부대였지만 놀랍게도 히믈러는 19393월 그의 사직을 받아들였고 히믈러는 곧바로 그의 체포를 지시했다.

 

오토란의 부고장

그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19393월 그가 성배를 찾을 때 자주 방문한 오스트리아의 고도 2,000미터가 되는 티롤 지역 쿠프슈타인 산을 방문한 후 실종되었는데 그의 나이는 35이다. 그의 시신은 3개월 후 발견되었다. 알려지기는 그가 독을 마시고 자살한 것인데 사후 조사에서 그의 시체 옆에 약병 2개가 있었지만 그의 사인은 약이 아니라 동사였다.

오토란이 실종되자 빌리구트 베이스토도 곧바로 강제로 SS에서 은퇴했고 아네네르베의 독립적인 기구 즉 히믈러에게만 독자적으로 보고하는 성배 탐험을 위한 부서는 해체되었다. 그가 실종된 지 2달 후 오토란의 사망 기사가 실렸다.

 

오토란19393월 눈보라로 비극적으로 사망했습니다. 오토란은 훌륭한 친위대원이자 저명한 역사적 학술 작품을 저술한 작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죽은 동지를 애도합니다.’

 

사망 기사는 히믈러의 비서실장인 칼 볼프가 서명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오토란유태인이라는 것이 알려져 자살했다고 방영했다. 그러나 2004년 오토란의 탄생 100주기에 맞춰 KBS-1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에선 그가 유대인이라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가 정말로 유대인이라면 신원증명이 철저한 SS에서 그를 임명하기 전에 밝혀지지 않았을 리 없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이 아니라 당대에 큰 범죄로 인식된 동성애자 명목으로 징계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무리 막강한 하인리히 히믈러이지만 오토란이 유대인이었다면 SS 장교로 등용했을까라는 의문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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