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의 언약궤, 솔로몬의 보물 발견(1)
35살에 사망한 SS대원이었음에도 성배, 십자군 전쟁 등에 관한 그의 연구와 파란만장한 삶은 많은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여러 작품들에서 오토란이 직접 캐릭터로 등장하기도 하였으며, 영화 「인디아나존스 최후의 성전」은 그를 대변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알려진다.
영국 <텔레그라프>지의 존 프레스톤은 「인디아나존스 최후의 성전」이 오토란을 모델로 각색된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오토란은 영화에서의 인디아나존스처럼 나치와 싸운 영웅은 결코 아니라 나치 소속의 고고학자였다. 특히 그가 나치에 반대하였다는 것은 사실로 보이는데 여하튼 「인디아나존스 최후의 성전」의 주제 자체는 제2차 세계대전의 성배 찾기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는 오토란의 연구결과에 기초한 히물러와 히틀러의 계획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인디아나존스 최후의 성전」에서 아돌프 히틀러와 하인리히 히믈러 그리고 인디아나존스가 함께 등장한다. 인디아나존스가 아버지 존스 박사의 노트를 찾기 위해 독일 육군 포병 소령으로 변장했는데 금서 소각 행사장에서 이들과 마주친다. 그런데 히틀러가 그의 노트를 보고 빼앗는데 놀랍게도 직접 싸인해 준 후 돌려준다. 이는 히믈러와 히틀러가 성배와 롱기누스 창에 집착했다는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한다.
<하인리히 히믈러의 망신>
하인리히 히믈러의 성배 찾기에서 매우 이상한 사건이 벌어진다. 오토란이 사망한 후이다.
히믈러는 1940년 10월, 새로 취임한 스페인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과 회담을 하기 위해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는데 이유는 히틀러가 프랑코를 우군으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3년 간의 치열한 내전 끝에 스페인을 장악한 프랑코는 어느 편도 들지 않았고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했다. 히틀러는 화가 나서 이탈리아 지도자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프랑코가 ‘겁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히믈러는 프랑코 총통과 회의가 끝난 후 곧바로 부하들과 함께 바르셀로나 인근에 있는 몬세라트(Montserrat) 수도원을 방문했다. 안드류 리폴 노블(Andreu Ripol Noble) 신부가 그들을 안내했는데 히믈러는 그에게 수도원의 지하를 보여 달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모두는 성배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압니다.”
리폴 신부가 수도원에 성배가 없다며 히믈러의 요청을 거부하자, 히믈러는 수도원 뒤의 산 아래 있다고 알려진 지하 통로를 방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리폴 신부는 그런 지하 통로는 없다고 거절했다. 또한 히믈러가 성배와 관련된 수도원의 모든 문서를 요구했지만 이 역시 거절당했다. 히믈러가 빈손으로 떠날 수 없었다.
사실 이 문제는 코미디나 마찬가지이다. 몽세라트 리코 공고라(Montserrat Rico Góngora) 박사는 히믈러를 안내한 안드류 리폴 노블 수도사를 인터뷰했는데 리폴은 히믈러가 피레네 산맥의 몽살바(Mont salvat)의 놀라운 성에 성배가 분명 보관되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히믈러는 성배가 보관되어 있다는 몽살바가 바로 몽세라트(Montserrat) 수도원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몽세라트 수도원은 6만 여개의 해저 융기로 이루어진 바위산 중턱에 자리잡은 수도원으로 기원후 50년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스페인의 성물 ‘검은 성모마리아상’이 보관된 곳으로 유명하다. 당초 이 상을 옮기려했으나 여의치 않자 11세기에 이 자리에 수도원을 지었다고 한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당대의 카타르파가 성배가 보관된 곳의 지명을 혼동시키기 위해 몽살바에 성배가 보관되어 있다고 적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오토란은 수없이 이들 지역을 탐사한 결과 몽살바가 사실은 프랑스의 몽세귀르라고 주장했다. 몽세라트(스페인)와 몽세귀르(프랑스) 모두 까타랑 지역에 위치하지만 히믈러가 성배의 전문가인 오토란의 설명을 듣지 않고 엉뚱한 곳을 찾았다는 것은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여하튼 히믈러는 빈손으로 몽세라트를 떠났다.
<하인리히 히믈러의 집념>
히믈러의 성배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1940년 6월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곧바로 스페인에서 프랑코를 만나고 몽세라트 수도원에서 성배 찾기를 시도했지만 히믈러는 이후 놀랍게도 숨고르기에 들어간다. 성배 찾기를 잠시 중단한 것이다.
대신 그는 각국에 아리안의 원적을 찾는 원정대를 파견한다. 학자들은 히믈러의 숨고르기를 스페인에서 망신당한 이유도 있지만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으므로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고 추정한다. 당시 독일은 프랑스를 완전 점령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 북부는 독일, 프랑스 남부는 페탱 원수의 비시 정권이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42년 말, 독일군은 아프리카에서 엘알라메인(EI Alamein) 전투의 패배,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하이드리히의 암살이 일어나고 연합군이 유럽을 침공하기 시작하자 히믈러는 성배를 찾을 시간이 촉박해졌다고 생각했다.
오토란이 개인 사생활 문제로 3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했지만 그가 히틀러와 히믈러가 강조하는 아리안 이론의 토대를 제공하여 제3제국이 세계를 지도해야 할 근원을 제시해 준 것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몇 년간의 탐험과 연구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증거 즉 성배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이론에 그쳤다고 볼 수 있는데 그의 결론은 간단했다. 오토란은 카타르 기사단 즉 템플기사단이 성배의 마지막 소유자였으며 성배가 기사단의 붕괴에도 교황과 프랑스 왕의 손에 빼앗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히믈러는 1943년 6월 역사가, 고고학자 및 지질학자로 구성된 학자들을 프랑스의 몽세귀르, 렌느-르-샤토를 포함한 프랑스 랑구독루씰론 지역에 투입했다. 히믈러가 오토란의 결론 즉 성배가 몽세귀르 인근이 아니라 스페인의 몽세라토 수도원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망신당했지만 결국 자신이 틀렸고 오토란의 결론 즉 그가 보물이 보관된 대략적인 위치에 근접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오토란의 궤적을 추적하면 성배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히믈러가 오토란의 대타를 찾았는데 그는 그의 휘하에 있는 SS 핵심인 오토 스코르체니(Otto Skorzeny, 1908〜1975)를 발탁했다. 그는 실패가 없는 군인 중 군인이라는 평판을 갖고 있으며 전력이 엔지니어인데다 재능 있는 언어학자이기도 하다.
<세계의 발굴자가 된 SS 스코르체니 대령>
오스트리아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스코르체니는 독일어, 프랑스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특히 펜싱 선수로 많은 시합에 참가하여 왼쪽 입에서 귀까지 찢어지는 큰 상처를 받았는데 이것이 그의 아이콘이 된다.
그는 빈공과대학 건축학과를 다녔고 1931년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가입했는데 얼마 후 오스트리아 대통령 빌렐름 미크라스(Wilhelm Miklas)에 대한 암살 사건에서 그를 구출하여 명성을 높였다. 이 공으로 1939년 히틀러의 사관생도 즉 히틀러의 보디가드 연대에 중위로 배치되었다.
1941년 6월 SS기갑사단에서 바르바로싸(Barbarossa) 작전에 참여했으며 1942년 큰 부상을 입고 독일의 철십자 훈장(Iron Cross)을 받았다. 1943년 특공부대의 대장이 된 스코르체니는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를 구출하는 명령을 히틀러로부터 직접 받았다.
스코르체니의 무솔리니 구출은 그야말로 전설이 된다.
북아프리카 전투가 지속되고 있던 1942년과 1943년 이탈리아는 영ㆍ미 연합군의 대대적인 폭격을 받았다. 더불어 독일의 롬멜 장군이 투입됐던 북아프리카 전투도 1943년 5월에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로부터 2개월 뒤인 7월 연합군은 이른바 허스키 작전(Operation Huskey)을 감행하여 시칠리아 섬에 상륙했다.
1943년 7월 연합군이 이탈리아 본토까지 공략할 채비를 갖추자 이탈리아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 대신 피에트로 바돌리오 원수를 행정수반으로 임명됐다. 이탈리아의 지도자가 된 바돌리오는 1943년 연합국과 휴전협정을 맺은 후 무솔리니를 체포했다. 체포된 무솔리니는 로마에서 161km 떨어진 아펜니노 산맥의 높은 봉우리인 그랑 사쏘(Gran Sasso) 꼭대기 부근의 캄포 임페라토르 호텔(Campo Imperatore Hotel)에 감금되어 있었다.
당시 연합군은 이탈리아 수도 로마를 향해 진격해 나갔는데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구출하여 연합군의 진격을 막고자했다. 무솔리니 구출작전을 위해 히틀러는 SS친위대의 슈코르체니에게 무솔리니 구출 임무를 맡겼다. 히틀러의 명령을 받은 슈코르체니와 107명의 특공대는 9월 12일, 글라이더에 올라 무솔리니가 감금되어 있는 호텔에서 18m도 안 되는 거리에 착륙했다. 슈코르체니는 저항하는 경비 병력을 제압하고 무솔리니가 있는 방문을 열고 그를 구출했다.
무솔리니를 만난 오토 슈코르체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도자가 나를 보냈다. 당신은 이제 자유다.’
구출된 무솔리니는 2일 후인 9월 14일 아침 동프로이센에서 히틀러를 만났다.
그의 천재적인 작전으로 무솔리니가 구출되자 소령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철십자 훈장보다 상위인 ‘기사 철십자 훈장(Knight's Cross)’, 친위대 해골 순금반지, 히틀러 친필이 금으로 양각된 금박 독수리 담배 케이스를 수여 받았다. 이 공적으로 연합국으로부터 독일에서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으로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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