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 코드』와 성배(2)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는 이노센트 3세로서는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었다. 교회의 본분을 지키라는 운동은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의 본분을 지키려는 개혁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랑구독루씰론 지역에서 번창하는 카타르파는 여타 개혁운동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기본적으로 교황청은 예수의 삼위일체설을 신봉하는데 카타르파는 아리우스(Arius, 250년 또는 256년〜336년)의 주장을 신봉한다는 점이다.
아리우스는 ‘성자’ 예수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지만 성부와 유사한 본질(유사본질), 곧 신성을 가진 존재로써 신으로 불릴 수 있지만 ‘참 신’은 오직 성부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는 인간도 ‘참 신’도 아닌 인간과 신(성부)의 중간 존재 즉 이원론을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예수의 중요성은 죽음과 부활이 아니라 그의 성스러운 가르침에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들은 신이 영적인 것을 창조하고 사탄이 물질적인 것을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가 신의 아들로서 육신과 인간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일원론 즉 삼위일체의 교황청논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즉 예수가 성부에게 종속적인 개념이라고 설명했고 초기 기독교에서는 매우 큰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라는 두 개의 원리가 작용하는 이원적인 교리인데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신이 보냈지만, 그는 신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모습을 취한 적이 없는 천사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예수는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며 그의 부활 역시 가상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교황청은 중세시대의 세속을 장악하면서 무소불위의 권한을 발휘하는데 이원론을 주장하는 카타르파는 예수를 인간으로 인정해야 비로소 기독교가 보다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이는 근원적으로 당대에 부패한 교황청이 주관하는 기독교의 정화를 뜻한다.
더구나 카타리파는 당시에 부패하고 세속적인 가톨릭 신부들에 비하여 보통 사람들이 크게 감명 받을 정도로 성스러운 생활을 했다. 더구나 카타리파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실제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조직적인 교회로 기독교 원리에 충실하면서도 사람들에게 보다 넓은 신앙의 자유를 주고 있었으므로 교황청의 실추된 이미지에 편승하여 불꽃과 같이 퍼져나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노센트 3세에게는 카드가 있었다. 카타리파가 교회 정화를 목표로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이원론을 주장하는데 이는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직접 주재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미 이단 중 이단으로 선언되었다는 점이다.
이노센트 3세는 카타리파를 지구상에서 남김없이 몰살시키는 것이 기독교인들이 ‘사탄의 덫’에 걸리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노센트 3세는 예루살렘의 이슬람을 격파하는 것보다 유럽 내부에서 생기는 종교개혁 운동의 선봉장인 카타르를 격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카타르파 또는 알비파는 남부 프랑스의 랑구독루씰론에서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던 이유는 이들 지역이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였기 때문이다. 카타르파를 알비파라 부르는 것은 1176년 알비에서 대중에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카타르파나 십자군이나 모두 철저한 기독교 신자를 의미하는데 학자들은 성배와 연결되는 유명한 템플기사단도 카타르파라고 설명된다.
이노센트 3세가 개혁운동에 손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 수구 세력의 손을 들어준 것은 만약 자신이 개혁 운동파의 손을 들어준다면 그들이 결국 교황권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유럽에 뿌리를 박고 있는 교황권 자체가 위험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198년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처음 이들을 회유하려 했다. 그러나 지역의 주교조차 지역 귀족들로부터 후원을 받을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자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종교계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명분에서 앞장서는 개혁세력을 곧바로 공격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교황은 당시 카타르파 중에서 가장 강력한 거점인 툴루즈의 레몽 6세를 1207년 파문하면서 랑구독루씰론의 성베르나르드(Saint Bernard)를 통해 그들을 포섭하려했다.
그러나 레몽6세가 반발하는데다 1208년 교황 특사인 카스텔나우의 피에르가 살해되면서 교황에게 카타르파를 공격할 명분을 제공했다. 이노센트 3세는 프랑스 국왕 필립 아우구스투스에게 섬멸해 달라고 부탁했다.1209년 프랑스 왕은 성지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리옹에 집결시켰는데 이를 전해들은 툴루즈의 레몽6세는 자신이 카타리파 토벌에 협조하겠다고 약속하여 교황이 파문을 취소한다.
그러자 툴루즈로 진격하려던 십자군은 몽펠리에로 방향을 돌려 카타르파의 거점인 베지에(Beziers)를 공격했다. 베지르인들은 곧바로 항복했다. 자신들을 공격한 십자군도 같은 기독교도이므로 재빨리 항복하면 최소한의 피해로 사태를 수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십자군들이 베지르를 점령한 후 아르노 아말릭 대수도원장에게 기독교인들과 이단을 구별하는 방법을 묻자 ‘모두 죽여라. 하느님께서 참된 기독교인들을 아실 것이다.’는 말과 함께 베지르 주민들을 모두 살해했다. 이후 인근 도시들도 모두 파괴되고 카타리파들은 모두 학살되었다.
십자군은 이어서 중세시대 최고의 철벽요새로 알려진 카르카손에 당도했다. 카르카손은 당대 최고의 철통같은 요새를 구축하여 어떠한 공격에도 맞서 싸울 수 있다고 알려졌지만 카르카손 성의 성주인 레이몽 로제 백작도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항복했는데 그 역시 감옥에 갇혔다. 이 당시 카르카손 시민들은 살해당하지 않았으나 모두 알몸으로 추방되었다고 알려진다.
이후 툴루즈의 공성전이 1211년에 벌어져 함락되었는데 성주인 레몽 6세와 아들 레몽 7세가 도주하였고 툴루즈 영역의 카타르파들로 하여금 반란을 주도했다.
그런데 전황에 다소 변화가 생긴다. 교황 이노센트 3세가 1216년 사망한 것이다. 기세를 올린 카타르파는 전력을 재정비하여 1218년 십자군 사령관 몽포르를 전사시키는 등 기선을 제압했다. 결국 십자군도 랑그독에서 철수하기 시작했고 툴루즈의 레몽 6세가 사망하고 레몽 7세가 이어받자 전황은 카타르파에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1223년 루이 8세가 프랑스왕이 되자 상황은 급변한다. 루이 8세는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한 랑구독루씰론 지역이 카타르파에 의해 번창하면 이들이 자신에 대항하는 왕국으로 독립할 수 있으므로 이들의 싹을 잘라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자신이 직접 십자군을 지휘하겠다고 선언한 후 1226년 6월 십자군과 함께 랑그독루씰론으로 진격하였다.
루이 8세의 소위 친정으로 많은 도시들이 저항없이 항복했고 추후 일시적으로 교황청이 들어서는 아비뇽도 공성전을 벌리다 항복했다.
1226년 루이 8세가 사망하고 루이 9세가 어린나이에 즉위하자 강골인 루이 8세의 왕비인 블랑쉬가 섭정한다. 그녀는 그야말로 권모술수가 능한 사람인데 일단 레몽 7세와 협정을 맺었다. 레몽 7세의 백작 지위를 보장하되 십자군에 합류한다는 조건이다. 레몽 7세가 이에 수긍하고 협정에 서명하자말자 블랑쉬는 레몽 7세를 체포했고 결국 랑구독루씰론 지역은 프랑스왕의 지배하로 들어간다.
그런데 교황청은 카타리파들이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라 단지 지하로 숨어든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교황청에서 기독교인이지만 이단을 몰살시키지 않는다면 두고두고 후회가 될 것이라며 특단의 조치를 구상하고 있는데 카타리파를 말살시키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종교재판소를 설치해야 한다는 건의가 들어왔다. 교황청에서 즉각적으로 허락했고 1229년 11월 툴루즈에서 종교재판이 시작되었고 그레고리 9세도 종교재판을 적극 지원했다.
그러므로 이 당시 발족한 종교재판소는 마녀 등 이단을 가려내기 위한 재판소가 아니라 오로지 카타리파 교도들을 학살하기 위해 설치한 추악한 제도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 교황권은 일반 제후보다 높았기 때문에 교황청의 종교재판소는 완전한 독립적 권한을 가지고 그들 자체의 감옥을 운영했으며 고문의 사용도 허가했다. 한 마디로 종교재판소에 일단 회부되는 순간 그들의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한 자료에 의하면 프랑스의 툴루즈에서 매일 6만 명의 사람이 화형에 처해졌다고 기록되었으며 학자들은 이 당시 약 100여 만 명의 카타르파들이 처형되었다고 추정한다.
조슬린 고드윈 박사는 카타리파와 교황청과의 전쟁을 다음과 같이 비꼬았다.
‘카타르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쟁은 가톨릭의 유일신 사상이 카타리파의 순수함을 화염과 칼로 짓밟은 전쟁과 다름아니다.’
랑구독루씰론의 카타르파와 십자군이 치열하게 대결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전세는 프랑스 왕을 업은 십자군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카타르와 교황청의 십자군과 전투는 알비파의 마지막 요새 즉 천혜의 요충지로 불리는 몽세귀르가 점령되는 1244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런데 학자들은 이들 전투에서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카타르파가 교황청과 끝까지 싸울 수 있었던 근저는 카타르파가 예수의 성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교황청과 프랑스왕이 철저하게 카타르를 분쇄하려한 것은 이단이 성배를 갖고 있는데 이 성배의 향방이 전황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물론 역사의 아이러니는 교황청이 그렇게 많은 카타리파를 살해하면서 확보하려한 성배를 끝까지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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