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노(예수) 수의의 비밀(1)
모든 종교의 성스런 유물들이 신비적인 환상을 자아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성유물에도 급이 있는데 제1급 유물은 성인 자신의 유골을 뜻하며, 2급 유물은 성인의 의복 또는 소유 물품 등을 뜻한다. 기독교에서는 예수와 직접 관련되는 세 개를 가장 중요하게 다룬다.
① 성배(Holy Grail)
② 롱기누스 창(Holy Lance)
③ 수의(Shroud of Turin)
이 중에서 ‘토리노의 수의’ 일명 ‘예수의 수의’는 이탈리아 토리노의 지오바니 바티스타 성당에 보관되어 있는데 1898년에 찍힌 네가티브 수의의 사진으로 1세기 이상 세계인의 관심을 모았다.
성경에 의하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는 아리마데 요셉이 본시오 빌라도 로마 총독에게 청하여 그 시체를 받아온 뒤 자신의 매장지로 미리 준비해둔 동굴 무덤에 안장했다. 당시 유태인들은 시신을 세마포로 말아서 매장하므로 예수의 시신도 세마포로 싸서 매장되었다고 알려진다.
그런데 3일 후 여인들이 예수의 시신에 향료를 바르러 찾아가보니 동굴 무덤의 문은 활짝 열려있고 예수의 시신을 덮은 세마포만 접혀져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이 세마포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왔다는 뜻이다.
1978년에 바티스타 성당은 400년 동안 보관해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수의를 일반에 공개했다. 이는 20세기 들어 1931년과 1933년에 이은 세 번째 공개였다. 그 당시 이 귀중한 예수의 수의를 보기 위해서 전 세계로부터 몰려든 순례자들은 6주일이라는 짧은 기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무려 300만 명이나 되었다. 수의가 공개될 때마다 엄청난 인원이 몰려들어 수의가 보관되어 있는 토리노는 물론 이탈리아의 경제에 큰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자색 천으로 되어 있는 이 수의는 불가사의한 성유물(聖遺物)답지 않게 폭 1.2m, 길이 4.36m로 겉보기에는 일반 천과 다름이 없다. 세마포로 된 이 천은 좌우 동형인 듯한 반점과 몇 개의 붉은 색 반점, 그리고 1532년 이 수의를 보관하고 있던 샹베르 교회에서 일어났던 대화재에 의하여 일부분이 탄 흔적이 있지만 비교적 보관 상태도 좋았다.
그러나 이 수의가 세인의 주목을 끌게 된 것은 좌우 동형의 반점이 가까운 데서 보면 단순히 짙거나 흐릿한 일련의 반점으로 보이나 약간 떨어져 보면 한 남자의 얼굴과 복부에 두 손을 모은 형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수의는 반으로 접힌 상태에서 한 쪽은 사람의 정면을, 다른 한 쪽은 사람의 등을 보여준다. 이 모습은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한 후 이 천으로 시신을 덮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전해진다. 또한 붉은 색의 짙고 엷은 반점은 예수의 상처에서 나온 출혈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믿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알려진 대로 예수의 수의가 틀림없는 것인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수의에 대한 진위성 여부 논쟁은 100여년을 넘어선다.
1898년 이탈리아의 변호사이자 아마추어 사진사인 세컨도 피아가 성당으로부터 촬영을 위촉받아 처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놀랍게도 피아는 자신이 찍은 사진의 음화판에서 이제까지 알려진 예수의 모습을 한 남자의 형상을 발견했다.
그가 본 것은 사진의 네거티브 원판으로 포지티브 즉 양화는 아니었다. 수의의 상 그 자체가 사진의 네거티브이므로 그것을 되돌리면 포지티브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유물이 진짜라면 피아는 예수의 사진을 본 것이다.
피아의 발표가 얼마나 큰 파장을 갖고 왔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수의는 사보이 공 즉 움베르토 1세의 소유인데 그는 수의가 틀림없는 진짜라고 믿었다. 사진사가 사진의 네거티브를 위조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놀랄만한 발견은 곧바로 전 세계로 타전되었으며 수의를 참배하려는 순례자들이 줄을 이었다.
<수의에서 인영 발견>
피아의 발견은 신앙계는 물론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거리가 되었다.
피아의 발견 자체를 부정하는 측은 피아의 사진 조작이나 혹은 속임수라고 일축하였다. 반면에 일부 종교계에서는 수의의 인영이야말로 예수 부활의 기적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흥분하였다.
이 논쟁은 몇 십 년 동안 끊임없이 계속되었으나 직업 사진사인 쥐세페 엔리가 1938년에 찍은 사진 역시 동일한 결과를 보여줌으로써 비로소 피아의 사진에 대한 시비는 종지부를 찍는다. 여하튼 부검전문가 카메론 교수는 사진을 판독한 결과 머리가 벗겨지고, 콧수염과 이마에 혈흔이 보이 보이며 팔뚝의 계단 모양 얼룩의 상처가 있는 것을 볼 때 사진의 남자는 예수와 동일한 방법 즉 십자가 처형된 사람의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 수의는 1357년경 조프푸아 드 샤르네가 프랑스 파리에서 남동쪽으로 100마일 가량 떨어진 마을 리레의 조그마한 교회(Our Lady of Lirey)를 건립한 후 일반에게 공개하면서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다시 말해 14세기 이전까지 이 수의는 유럽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었다. 수의에는 갈색의 사람 모양이 희미하게 나타나 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두 개의 상이다. 하나는 정면상이고 또 하나는 배면상 같았다. 시체를 수의의 절반에 눕히고 위의 절반을 접어서 시체를 덮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 인간상은 현상이 잘 안 된 사진처럼 수의에 찍혀 있었다.
수의가 알려진대로 예수의 수의라면 중요성과 파괴력은 말할 필요가 없다. 소문이 퍼지면서 리레의 성당에는 신자들이 몰려들었고 헌금함에는 돈이 산처럼 쌓였다.
그후 수의의 소유자가 바뀌어 1532년 샹베르 성당에 보관되어 있던 중에 화재에 의하여 수의의 일부가 불타는 수난도 겪었다. 은으로 만든 상자가 화재로 녹아내리면서 수의에 떨어져 일부분이 타고 구멍이 뚫린 것이다. 그후 수의는 비밀로 보관되어 오다가 피아의 사진 때문에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반면에 이 수의가 인위적인 조작, 즉 그림이나 조작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의가 곧바로 제기되었다. 수의에 그려진 그림이 가짜 즉 예술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수의가 가짜일수도 있다는 가정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중세시대에 갑자기 프랑스에서 수의가 공개된 이후 그야말로 유럽을 강타하자 많은 예술가들이 수의를 직접 보거나 설명을 듣고 모사하는데 열심이었다는 것이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중세시대에 수의를 모사한 숫자만 해도 62개나 된다고 했다.
이런 숫자를 제외하더라도 중세 시대에 예수의 수의라고 알려진 것이 최소한 43개가 있었다는 기록도 제시되었다. 이들 중 거의 대부분 파손 또는 분실되었지만 그 중에서 토리노의 수의가 아직까지 보존되어 있다고 하여 진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중세 시대에 수의 외에도 예수와 관련된 성유물이 많이 나돌았다. 예수가 처형되었다고 알려진 십자가를 비롯해 예수의 손과 발에 박혔던 못, 예수의 머리에 씌워진 가시면류관, 예수의 옆구리 부분을 찔렀던 로마 군병의 창으로 알려지는 ‘롱기누스의 창’ 은 물론 예수의 시신을 닦았다는 수건 등이 모두 성유물로 받들어졌다.
중세 시대 사람들은 거의 모두 글자를 읽거나 쓰지 못했으므로 이런 무지몽매한 대중들에게 믿음의 확신을 심어주기 위한 가장 좋은 방편이 바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여긴 성유물이었다.
따라서 대형 교회들의 경우 이런 성유물을 한두 가지 보관하고 있지 않으면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할 정도로 경쟁적으로 성유물을 내세웠다. 자연히 가짜 성유물이 많이 나돌 수밖에 없었는데, 특히 예수의 수의가 가장 많이 나돌았다.
이런 내용을 접한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은 독설가로 유명한데 그는 ‘예수가 못 박혔다고 전해지는 십자가를 모두 모으면 배 한 척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심지어는 전천후 천재로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자신의 얼굴을 모델로 그렸다는 설명도 있을 정도이다. 물론 이 주장은 곧바로 폐기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에 태어났는데 수의가 유럽에 처음 나타난 것은 1357년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수많은 수의가 있었다는데 반면에 수의가 진짜라고 믿는 사람들은 프랑스에서 수의가 처음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그에 대한 역사 기록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4세기경 에데사의 왕 아브갈이 다대오 사도가 건네준 예수의 얼굴이 그려진 천을 받고서 나병이 나았다고 기록된 시리아의 사본이 바로 그것이다.
에데사는 현재 터키의 동남부 우르파 지역에 있었던 고대 왕국이다. 이후 수의는 도난 방지를 위해 ‘만딜리온’이라 불렸다. 만딜리온은 그리스어로 ‘수건’이란 의미인데, 그렇게 부른 것은 다른 사람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에데사에 대형 홍수가 일어나 수의는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그 후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 즉 현재의 터키 이스탄불로 옮겨졌다. 그러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동로마제국을 침공한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한 기사에 의해 약탈당해 프랑스로 넘어왔다는 것이다. 물론 바로 이것이 토리노 수의라는 것에는 이의가 있다.
다소 엉뚱한 일이지만 이 수의를 아돌프 히틀러가 탐냈다는 것도 진본이라는데 힘을 실어주었다. 아돌프 히믈러는 예수의 3대 성유물 즉 성배, 롱기누스창에 애착을 보였는데 토리노의 수의에도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히틀러가 수의에 관심을 보인다는 이야기가 나돌자 수의는 토리노를 벗어난 적이 없었는데, 딱 한 번 나폴리 외곽으로 옮겨졌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39년으로서, 캄파니아 지방의 베네딕트 수도원에 보관되다가 전쟁이 끝난 후인 1946년 토리노로 되돌아왔다. 전쟁 전인 1938년 히틀러가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 그의 보좌관들이 집요하게 수의에 대해 캐묻는 것을 보고 교황청에서 전쟁이 나자마자 몰래 수의를 빼돌렸다는 것이다. 수의가 가짜였다면 히틀러가 그렇게도 관심을 보였겠느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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