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기누스 창(2)
① 로마
로마의 롱기누스 창으로 묘사되는 유물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 아래에 보존되어 있지만 교황청은 그 진위를 확인하지 않는다. 창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피아첸차(iacenza)의 순례자 안토니우스(Antoninus)가 기원 570년 예루살렘의 성지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예수에게 씌운 가시 면류관과 옆구리를 찌른 창에 대해서 적은 것이다.
615년, 예루살렘은 페르시아 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크로니콘 파스칼레(Chronicon Paschale)에 따르면, 이때 롱기누스 창이 부러졌는데 부러진 창 끝은, 같은 해에 니세타스에게 주어졌다. 그는 그것을 콘스탄티노플 가져가 유명한 아야소피아 성당, 이후 동정녀 교회에 기탁했다고 한다. 한편 아르쿨푸스(Arculpus)는 670년경 예루살렘의 성묘 교회에서 보았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상황 설명이 엇갈리는데 적어도 예수가 골고다에서 처형된 이후 600년 동안 롱기누스 창에 대해 이야기가 없다가 갑자기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후 여러 사람들이 롱기누스의 창이 8세기 콘스탄티노플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유물은 이후 투르크의 손에 넘어갔는데, 1492년 술탄 바예지드 2세가 로마에 수감되어 있던 술탄의 형제 젬(Djem)과 교환하여 교황 이노센트 8세에게 보냈다. 그러나 이때에 이미 파리, 뉴른베르크에도 롱기누스 창이 있다는 소식이 있으므로 이노센트 8세가 이를 신빙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여하튼 로마의 롱기누스 창은 끝이 부러져 그 끝을 잃어버렸는데 18세기 중반,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파리에 있는 창 끝의 그림을 보고 성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롱기누스 창과 짝이 맞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그것이 진정한 롱기누스 창이라고 밝히지 않았다. 이는 교황조차도 그 진위를 확신하지 못했음을 시사하는데 이후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을 떠난 적이 없다.
이 롱기누스 창은 대성당의 돔을 지지하는 4개의 거대한 교각 중 하나에 보관되어 있다고 알려진다. 각각 높이가 거의 150피트에 달하는 지지 교각 상단에 갤러리가 있는데 1624년 교황 우르바노 8세가 롱기누스창, 베로니카의 베일, 성 안드레아의 머리 등을 보관토록 명령하였다. 이에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가 롱기누스 동상을 제작하여 안치했다.
② 비엔나
비엔나의 롱기누스 창은 오스트리아 대통령의 거처이기도 했던 비엔나의 호프부르크 궁전 세계 보물실에 전시되어 있다. 카롤링거 왕조 전형적인 날개 달린 창으로 한때 성 모리스(Saint Maurice) 또는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e the Great) 의 창이라고 불렸다. 영화 「콘스탄틴」에서 운명의 창으로 묘사된 모델이기도 하다.
창머리 자체는 정교하고 강력한 날개 달린 창으로,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밑 부분이 넓고 구부러지고 가늘어지는 중간 부분이 있으며 끝 부분으로 갈수록 넓어진다. 언뜻 보기에 창날은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단순한 군인의 창이라고 하기에는 정교하고 의례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지적이 있다.
912년에서 973년 사이에 살았던 오토 1세부터 신성 로마 황제가 창을 소유했는데, 1000년 오토 3세가 폴란드 초대왕인 볼레슬라프 1세에게 창의 복제품을 선물했고 실물도 남아있다.
한편 1084년 헨리 4세는 중간 부분에 ‘우리 주님의 못’이라고 적힌 은색 띠를 추가했다. 추후 이 은색 밴드는 1350년 경 찰스 4세에 의해 황금색 밴드로 덮였다. 황금 소매에 적힌 ‘창과 못’이란 문구는 창에 망치로 박힌 쇠 못을 말하는데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사용한 못이라는 설명이다.
비엔나 창은 신성한 창으로 점점 더 확고한 명성을 얻으며 1273년 대관식에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하튼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제국의 휘장으로 일부 사용했던 창은 이후 호헨슈타우펜 가문, 색슨왕인 바바로사(Barbarossa)의 손을 거쳐 하인리히 6세, 오토 4세, 프리드리히 2세 등으로 이어지는데 1424년 신성로마제국의 지기스문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왕관, 구, 홀, 십자가, 검, 창은 결코 조국의 땅을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이 신의 뜻이다.’
그는 롱기누스 창을 포함한 관련 유물 일체를 뉘른베르크로 옮겨 영원히 보관할 것을 명령했는데 그들을 임페리얼 레갈리아(Imperial Regalia)라고 불렀다.
뉘른베르크에 있던 롱기누스 창이 비엔나로 옮겨진 발단은 프랑스에서의 혁명 및 나폴레옹의 등장 때문이다. 1796년 봄, 프랑스 혁명군이 뉘른베르크에 접근했을 때, 시의원들은 안전한 보관을 위해 이들을 비엔나의 폰 휘겔 남작에게 맡겼다. 수집품은 위협이 해결되면 물건을 돌려받는다는 조건이다.
그러나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해산되자 휘겔 남작은 독단으로 컬렉션을 합스부르크 왕가에 팔았다. 시의원들이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하자 컬렉션 반환을 요청했지만 오스트리아 당국은 거부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1918년에 해산되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때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합병되자 나치는 이들 롱기누스 창이 포함된 컬렉션을 뉘른베르크로 가져와 1938년 9월 당 대회에서 전시했다. 이후 당대에 독일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중세 지하실인 히스토리슈어 쿤스트벙커(Historischer Kunstbunker)로 옮겼다. 임페리알 레갈리아의 대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 연합군에 의해 회수되었는데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
③ 바가르샤파트(Vagharshapat)의 롱기누스 창
아르메니아의 종교 수도인 바가르샤파트(Vagharshapa)의 에크미아진(Echmiadzin)에도 롱기누스 창이 보관되어 있다. 아르메니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국가중 하나인데 이 창에 대한 기록은 13세기 아르메니아 필사본에서 보인다. 이 자료에 의하면 예수를 찌른 창은 사도 타데우스(Jude Thaddaeus)가 아르메니아로 가져왔다고 한다. 1268년, 프로쉬(Prosh) 왕자가 롱기누스 창은 호화로운 진열 케이스에 넣었는데 1600년대에 새로운 케이스로 교체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이 창에는 예수를 찌른 롱기누스 창의 진본이라는 이유와 아니라는 이유가 있다.
우선 이 창의 형태가 당시 로마 전투 군단이 사용하는 창이 아니라 점령 지역의 군사 기지에서 복무한 로마 군대에 의해 사용되었던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아르메니아 창의 너비는 토리노(예수)의 수의에 있는 창 표시와 일치한다.
그러나 이 창의 문제는 13세기 이전 즉 약 1,200년 동안 어느 곳에 보관했었는지에 대한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알렉사(Aleksa) 박사는 이 창의 끝이 너무 넓기 때문에 누군가를 다치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 창 머리는 실제 무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일반 창과는 달리 아무 것도 꿰뚫을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모양을 볼 때 순전히 의식적이다. 실제 창을 현재의 형태로 재단조했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창머리에 상징적인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예수 시대의 형태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아르메니아에 보관된 창을 원본 롱기누스 창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그러므로 학자들이 이 창에 대한 과학적인 검증을 요청했지만 이에 대한 대답은 없으므로 여전히 논란의 대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롱기누스의 창에 대한 아르메니아인들의 믿음은 공고하다.
④ 안티오크의 롱기누스 창
제1차 십자군 원정기간인 1098년 6월 십자군은 무슬림 군대에 의해 안티오크 시에 포위되었다. 그런데 파리의 농부로 십자군에 참여한 피터 바돌로매(Peter Bartholomew)가, 성안드레아가 일련의 환상으로 롱기누스 창의 위치를 알려주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곳은 안티옥의 성베드로(피터) 대성당 밑이다.
교황 사절인 르 푸이의 아드헤마르(Adhémar)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바돌로매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콧웃음쳤지만 안티오크 성을 지키고 있던 툴루즈의 레이몬드는 그가 말한 곳을 수색하라고 했다.
첫날에는 창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다음 날 창으로 추정되는 철 조각을 찾아냈다. 이 금속 조각이 진정한 롱기누스 창의 유물이든 아니든, 십자군은 롱기누스 창이 발견되었다고 알려지자 힘을 얻어 도시를 나가 이슬람교도를 공격하여 승리했다. 결론은 십자군의 기대대로 롱기누스 창을 확보하자 이슬람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이 승리로 십자군이 위기에서 벗어났고 레이몬 백작은 영웅으로 부상했다. 백작이 롱기누스 창을 확보했지만 곧바로 유물의 진위 여부가 불거졌다. 결국 1099년 4월, 발설자인 농부 피터 바돌로매는 불의 시련을 받아야 했다. 튜닉만 입고 롱기누스 창을 들고 두 개의 거대한 타오르는 나무 더미 사이의 좁은 통로를 걸어가는 것이다. 롱기누스 창이 진짜라면 그는 당연히 불길에서 안전해야 했다.
그러나 바돌로매는 불길 속에서 끔찍하게 화상을 입었고 20일 후 사망했다. 롱기누스 창으로 알려진 창의 영험함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지만 여하튼 이 창은 계속 신화를 이어갔고 현재도 안티오크에서는 예수를 찌른 진본이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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