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3대 성유물

예수의 3대 성유물(24)

Que sais 2021. 9. 6. 09:43

https://youtu.be/3d4oMQhDvO4

토리노(예수)수의의 비밀(5)

<교황청의 고민>

수의에 대해 이냐 거짓이냐로 기독계가 온통 반분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데 독일 작가 쿠르트 베르나수의가 진짜임을 전제로 매우 놀랄만한 견해를 밝혔다는 것을 앞에서 설명했다.

그는 수의가 예수의 수의가 틀림없다면 피의 얼룩으로 보아 ‘그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후에도 심장이 아직 뛰고 있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여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예수의 시신이 십자가에서 사망한 후 내려졌다면 상처에서 흐르던 피는 이미 멈춰 있었기 때문에 체외의 피는 수의에 싸기 전에 말라붙어 있어야 했다는 것을 강조했다그의 주장은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숨졌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되므로 곧바로 신성모독이라는 비난까지 받았다.

베르나의 주장케레스텐 박사에 의해 더욱 구체화되어 세계를 놀라게 했다그의 결론도 예수가 십자가에서 사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그의 설명은 그야말로 구체적이다.

케레스텐 박사아리마데 요셉이 아무도 묻히지 않은 무덤을 미리 구입했다는 점부터 지적했다또한 예수가 십자가에 묶인 시간이 3시간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십자가에서 내려졌다는 점도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당시의 법으로는 십자가형에 처해진 사람은 사망이 확인되어야 내려질 수 있는데 그는 십자가에 묶인 사람이 5이나 묶여도 살아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즉 어떤 밀약에 의해 예수가 처형된 지 3시간 만에 십자가에서 내려졌는데 케레스텐 박사는 이와 같이 예외적인 조치는 아리마데 요셉빌라도와 협상을 벌렸고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서 끌어내는데 승낙했다는 것이다.

요셉이 시신들이 묻히지 않은 무덤을 새로 구입한 것도 사전에 예수를 치료하기 위해서라고 추정했다성경에는 예수에게 몰약과 침향을 발랐다고 하는데 당대에 몰약지혈제로 사용되고 침향상처를 치료하는데 사용했다세마포로 예수의 시신을 싼 것은 오염과 벌레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라는 설명이다예수는 상처가 심했기 때문에 세마포에 쌓여 상당 기간 동안 움직이지도 못했는데 이때 몰약이 세마포에 작용하여 수의에서 보이는 갈색 자국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한마디로 예수의 처형 전후를 자세히 살펴본다면 수의의 자국을 기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의 설명은 성경에서 설명하는 예수의 부활에도 치명타를 날렸다.

예수가 사망하지 않고 3일 후에 일어나 무덤을 나갔기 때문에 수의만 남은 것은 당연하다는 설명이다이와 같은 사건은 예수가 꾸민 일이 아니라 요셉이 준비한 것이지만 예수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후 3일 후에 깨어나자 현실로 받아드리고 곧바로 현장을 떠났다고 덧붙였다그것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되기는 했지만 사망하지 않았다이슬람교의 전승과도 일치한다고 역설했다.

케레스텐의 주장은 신성모독에 겹쳐 유대교와 기독교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으나 토리노의 수의가 가짜라면 충분한 설명이 가능하다. 그의 주장은 토리노의 수의가 진실이라는 것을 토대로 반론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의자도 가짜>

교황청이 선뜻 연대측정에 주저하는 것은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1968바오로 2는 가톨릭 교회의 가장 유명한 성유물 중 하나인 1대 교황인 성 바오로가 사용하였다고 알려진 의자의 연대측정하도록 허가하였다이 의자는 상아로 상감된 참나무 재질의 고가구로서 유명한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베르넹에 의하여 1657년에 시작하여 1666년에 조각이 완성된 금박입힌 청동 기념물 안에 놓여 있었다그러나 탄소연대측정을 해보니 이 유물은 기원후 9세기 작품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성 베드로(St.Peter)'가 로마에서 선교 활동을 할 때 앉았던 나무 의자의 조각들을 모아 5세기경 상아로 장식된 의자로 만들었다고 함)

이러한 실패의 예도 있으므로 굳이 과학이라는 명분 때문에 인간의 정신적인 영역인 종교까지 침해당해야 하는 것이 옳으냐는 비판도 있었다종교적인 분야는 과학이 아닌 종교문제로 귀착시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고대 유물이 진본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데는 탄소연대측정법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었다탄소연대측정을 위해서는 수의를 적어도 가로세로 15cm 크기로 오려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의 가톨릭 신자들의 구심점인 교황청에서 토리노의 수의과학적으로 분석하자는 제안을 계속 묵살할 수만은 없었다우선 교황청에서도 토리노의 수의가 진짜임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탄소연대측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이미 수의의 주인공이 예수가 아닐 확률이 2,250억 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고 발표된 데다가 수의가 진짜로 판명될 경우 기독교인들의 믿음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더구나 과학자들은 탄소연대측정법을 개선하여 길이 7cm에 폭 1cm의 크기만으로도 연대측정이 가능하다고 부추겼다.

드디어 교황청에서도 결단을 내렸다. 수의의 연대측정허락하겠다는 것이다.

원래 연대측정 기관으로 7개의 연구소가 거론되었으나 이중 옥스퍼드, 매국 애리조나 및 스위스 취리히가 선정되었고 대영박물관에서 고문을 파견했다.

1988 421일 전 세계의 주목 속에 토리노 성당의 수의는 1x5.7센티미터의 작은 우표 크기만한 3조각으로 다시 나뉘어졌다. 3조각은 각각 미국 아리조나의 터슨 대학영국의 옥스포드 대학스위스의 쥬리히 폴리테크닉 대학으로 보내졌다기원후 2세기 초중세 말기의 대조 표준연대가 정확히 알려진 다른 견본들도 함께 보내졌다핵가속기가 이 수의에 남아 있는 방사성 탄소 동위 원소들을 측정했다.

사실 4.4미터나 되는 커다란 천에서 가장자리를 잘라 실험에 사용되었는데 약간의 이론이 있을 수 있지만 이들 사용 단일 샘플이 전체 수의 천을 대표한다고 가정했다. 수의가 일관된 제작 방식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시나가 역시나>

1988 10 13 10토리노의 지오바니 바티스타 성당발레스트레로 추기경은 세 연구소의 연구 결과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옥스퍼드 대학 해지스 박사의 결론 놀랍게도 가짜라는 것이다.

해지스 박사가 발표한 것은 현재(BP)로 아리조나는 646 ± 31, 취리히는 676 ± 24, 옥스퍼드는 750 ± 30년으로 발표되었다. ‘현재(BP)195011을 의미하는데 이를 토대로 보정된 BP 연도는 역년으로 변환되어 이중 범위 즉 12621312 13531384가 나오므로 이를 1260년에서 1390년 사이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실험의 정확도는 95%, 오차는 200년 미만이다. 이는 토리노 수의의 제작 연대는 수의가 유럽에 처음으로 발견되던 바로 그 즈음인 기원후 1260년에서 1390년 사이로 판정되었다는 뜻이다.

이는 예수가 사망한 시기와 약 1300년이나 차이가 난다탄소연대측정법에서 도출된 결과는 프랑스 리레에서 처음 수의가 공개된 시점과 일치그 당시 순례자들을 모으기 위해 위조했을 거라는 회의론자들의 기존 주장을 증명하는 셈이 되었다세계가 경악하였음은 물론이다.

조사를 담당하였던 스위스의 윌리 뵐프리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토리노의 수의가 가짜라는 연구 결과에 대하여 놀라지 않으셨습니까?”

전혀 놀라지 않았습니다수의에 대한 역사를 고려한다면 그것이 2,000년이나 오래된 직물이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실험은 나의 견해를 확인하여 준 것뿐입니다.”

 

예수가 죽은 지 수세기가 지나자 기독교인들은 예수나 순교자들의 삶과 직접 연관된 유물들을 찾고자 했다성자의 유품은 초자연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중세의 서유럽의 모든 성당교회 그리고 수도원은 적어도 성유물 한 가지 정도는 소장해야만 대접을 받았다유물들은 기도와 병 치료를 원하는 순례자들을 끌어 모으는 역할을 했고 기금 모집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따라서 유물을 조작하는 사기행위도 발달했으며 유물만을 훔치는 도둑질도 성행했다심지어는 여러 성당이 골고루 나눠 가질 수 있도록 성자의 시신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기도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십자군 전쟁시에 유럽으로 들어온 가짜 수의의 진상을 쉽게 알아낼 수 있다십자군 전쟁기독교에 대한 맹신과 당시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있던 아랍인들에 대한 무지에서 일어난 전쟁이었다. 11세기에 들어오면서 유럽은 인구가 늘어나고 농업 생산이 호조를 보여 도시가 형성되는 등 점차 사회가 안정되었다자연히 무역을 위주로 하는 상인들은 차차 유럽 밖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때 지중해를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은 유럽 상인들의 교역을 방해하고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기독교도를 박해했다이에 따라 이슬람교도로부터 예루살렘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마침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마 교황에게 셀주크 투르크의 침입을 호소하자교황 우르반 2는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종교 회의를 열고 성지를 되찾기 위해 십자군을 보낼 것을 제의하였다.

서기 1096년부터 1270년까지 약 170에 걸친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다신앙심을 가지고 모인 십자군은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점차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결국 1차 십자군 원정을 제외하고는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특히 전쟁을 일으킨 기독교도들은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던 아랍인들이 자신들보다 더 선진 문명을 갖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 와중에서 상술에 밝은 아랍인들은 십자군 전쟁에 참가한 유럽인들이 예수에 관계되는 모든 유물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을 알아차렸다유럽인들에게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 속에 예수를 매장하기 전 예수의 시신을 쌌던 수의만큼 호기심을 일으킨 것은 없었을 것이다결국 아랍인들은 가짜로 수의를 만들어 성유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유럽인들에게 판매함으로써 자신의 영토를 침략한 이방인들에게 가장 통쾌한 복수를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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